영상한국사 I 209 여운형, 통일정부를 꿈꾸다
영상한국사 I 209 여운형, 통일정부를 꿈꾸다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조선 독립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상해임시정부 초대내각에 외무부 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 여운형은 일본 내각의 초청을 받는다. 수백 명의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한다. 여운형을 회유하려 한 일본 내각은 역풍을 맞아 중의원 해산 사태에 놓인다. 1929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수감된다.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된 그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일장기 삭제 사진을 게재했다. 1944년 8월, 여운형은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을 모아 건국동맹을 결성한다. 이는 해방 후 출범 이틀 만에 체계를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안으로 좌우대립이 극렬해졌다. 통일임시정부 구성을 논의하려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제안하고, 여운형은 이를 반대한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한 여운형에게 양 진영의 비난과 공세가 쏟아지고, 그를 향한 끊임없는 테러가 발생한다.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다. 그의 죽음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이 멈춰버린다.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몽양(夢陽)이라는 아호와 '3.1 운동의 기획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 정치적 입지를 가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1년 전에 사망하면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출생 :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묘골)(現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사망 : 1947년 7월 19일(향년 61세),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6)
묘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서울 여운형 묘소
본관 : 함양 여씨
재임기간 : 초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초대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