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코너♣/김광영의 삶

[한국현대사]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삼천만동포에 고함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25. 10. 22. 10:04

[한국현대사]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삼천만동포에 고함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1948. 4.19)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남북협상을 위해 북상하던 도중 38선 경계에서 잠시 쉬고 있다. 오른쪽은 아들 김신, 왼쪽은 비서 선우진

 

김구는 1948년 2월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남북협상의 길에 오른다. 1948년에 접어들며 남북 양쪽에 단독 정권이 들어설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서 분단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쪽 정권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김구 김규식 등 이른바 남북협상 세력은 김일성과 김두봉게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유엔한국위원단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김구 일행의 북행에 반대했으며 청년단체 학생 기독교단체 베트남 인사들의 단체들까지 반대 저지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김구 일해은 북행을 강행, 1949년 4월19일에서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이와 별도로 ‘4김회담’을 열었다.

 

 

김구선생과 김일성

‘4김회담’이 열리기에 앞서 평양에서는 남북요인 15명이 참석한 정치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4월27일부터 30일 사이에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요인회담에는 남측대표로 김구·김규식·조소항· 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이, 북측대표로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이 요인회담은 해방 후 좌우익과 중도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모임이었다. 남북협상에 비판적인 이승만과 소년군에 연금상태에 있던 조만식이 불참하기는 했지만 15명의 요인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남북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절호의 기회였다.

 

김구선생

▲좌 이승만,  우 김구

 

요인회담에서 김규식이 북행에 앞서 김일성에게 제시한 5개항의 원칙을 놓고 토의를 진행했다.

5개항의 선행조건은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사유재산 제도의 승인▲통일중앙정부 수립▲외국에 군사기지 불제공▲미·소 양군 철수 등이었다.

요인회담은 이 5개항의 원칙을 축조심의하여 5월 1일 4개항의 성명서 초안을 채택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외국군이 철수하는 것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둘째 외국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일어날 수 없으며 반통일적인 무질서의 발상도 허용치 않음을 확인한다.

셋째 여러 정당단체들은 국민을 대표하는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 정부는 비밀투표로써 통일적인 입법기관을 조직한다.

넷째 남한의 단정·단선을 반대하며 동시에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5인 요인회담에 앞서 평양에서는 이른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4월19일 개막되어 8일간 계속되었다.

첫날은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545명이 참석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 회의는 차츰 군중대회식으로 변질되어 본래 김구·김규식이 주장했던 남북고위정치협상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4김회담’에서 김구 김규식은 수풍발전소의 송전을 계속하며 연백수리조합 개방, 조만식의 베트남 허용,여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서울봉환 문제를 제의해 앞의 두 가지는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안 의사 유해봉환은 소련군 점령지역이라 소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서 북측은 자세한 회답을 피했다.

 

회담을 마친 두 김 씨와 수행원들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은 귀환성명을 통해 이 회담이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남북의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데 있으며, 미·소 양군 철수를 요구하는 데도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또 북쪽이 절대로 단정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송전과 연백저수지 개방에 동의했다는 점도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대한 통일운동의 열의와 성의에도 불구하고 하지 중장은 남북정당 사회단체대표 합동회의 요청서에 대한 불찬성 성명을 발표하고, 5·10선거는 남한만의 참여로 치러지게 되었다. 4김회담을 비롯한 남북협상파의 노력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겨레의 소망과는 달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단선 단정수립에 맞서 제2차 남북협상을 해주에서 열 것을 제의했고, 김구 김규식은 북에 머물고 있는 홍명희를 서울로 오게해서 미리 의논하기를 요청했으나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북측은 두 김 씨의 참석 없이 6월 2일부터 제2차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어 남한의 총선을 규탄하면서 북쪽만의 선거에 의한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신국기를 제정했으며 그때까지 통용되던 태극기를 폐지했다. 송전도 중단되었다. 이로써 남북의 분단은 고착되고 대결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