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①한반도 신탁통치 구상과 소련의 대일전
대한민국 통일부 ・2022. 9. 12. 14:00
8 월 15일은 우리에게 여러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1945년 8월 15일은 한민족이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기쁨의 날이고,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부수립이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루어진 날이라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날이기도 합니다. 이번 기사를 포함한 총 5편의 기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 분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1화 보기>
카이로 회담: 독립에 대한 보장과 신탁통치 구상의 공존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3년 11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간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독립 조항이 포함된 것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 총통의 공헌이 크다고 합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사진=독립기념관)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국민당 정부와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노력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중 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했으며, 이것이 몇 차례의 논의와 수정을 거쳐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동안 임시정부가 장제스 총통을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은 2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한 강대국 정상들의 회담이었던 만큼 그들의 이해관계와 전략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당시 장제스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를 원했고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처지를 고려해 한반도의 독립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이 아닌 ‘적절한 시기에 독립’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병준 교수는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카이로 회담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이 논의되고 보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강대국들 각각의 이해관계와 전략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 구상이 포함되기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한반도 분할점령
한반도 분단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되고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가던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 대일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자국의 피해를 줄이고자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청하였고, 소련이 이를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 직후 4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에 따르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제주의자로서 소련을 국제기구의 틀 속에 참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에도 소련을 참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 부통령은 국가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소련에 대한 봉쇄를 선택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과는 달리 소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취하고 있었고, 이것은 이후 대한반도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대일 선전포고 후 만주와 한반도 방면으로 진격해왔고, 8월 15일 일본의 패망 직전까지 파죽지세로 한반도까지 남하하게 됩니다. 이에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에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것을 염려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소련이 이를 수용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한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결정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반도 분단의 불행한 시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인 9월 9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한반도의 남쪽에는 미군정, 북쪽에는 소련군정이 실시됩니다.
미국의 두 지도자: 루스벨트와 트루먼
△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
△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사진=백악관/whitehouse.gov) |
이화여자대학교 노경덕 교수는 얄타회담까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구상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의 원칙이 합의된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상주의적 구상이 아닌 소련을 경계하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펼치면서 이것이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얄타 회담까지 유효했던 루스벨트의 구상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면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아닌 열강들의 대내외적 정치 상황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된 것은 우리에겐 매우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반도 분단의 시작에는 강대국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합국 사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처음 약속된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포함되었습니다. 얄타 회담은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추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분단에 있어 이러한 강대국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동의대학교 주봉호 교수는 한반도의 분단은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오로지 외세에만 있지는 않다는 의미입니다.
②편에서는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이후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각각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펼친 정책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이후 이를 둘러싼 좌우익의 갈등이 심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서 외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했던 우리 민족의 과오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2화 보기>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②]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좌우대립
지난 기사에서는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으로 한반도의 독립이 결정된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
위 기사에서는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으로 한반도의 독립이 결정된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구상되고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한반도가 분할점령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며 외적인 요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기사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 이후 우리 민족이 외세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분단에 이르는 과정 중 하나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과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을 살펴보겠습니다.
[
일본의 항복과 한반도 분할점령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할 것을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9월 2일에는 미국의 전함인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했다고 하여 우리 민족이 바로 독립된 국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점령하였기 때문입니다.
△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미국 대표 체스터 니미츠 제독(사진=flickr)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처음부터 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선 기사에서 살펴보았듯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도 카이로 회담 직후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미소 양군의 점령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였고, 이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 간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주요하게 결정된 사항은 첫째, 한국의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이를 돕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 셋째, 한반도에 대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사항 중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한반도의 좌우익을 대립하게 하였습니다.
신탁통치 오보 사건과 좌우익의 대립
앞서 살펴보았듯이 본래 신탁통치는 미국 측의 구상이었습니다.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한반도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오보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른바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한 언론사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내용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해 민중들이 회의 결정 내용을 오해하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신탁통치 소식이 처음 국내에 전해졌을 때, 좌익과 우익은 모두 반대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한 36년간의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 민족에게 다시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은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즉,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지지 집회(사진=국사편찬위원회)
그 이유는, 한반도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이롭다는 것이었으며, 좌익은 자신들이 처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은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3국 외상 회의 직후 좌익은 회의 결정 내용 중 임시민주정부의 수립에, 우익은 신탁통치에 역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우익은 신탁통치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을 강하게 규탄했습니다. 우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을 매국노라고도 불렀고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극렬해졌습니다.
△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전단 (사진=한국문화정보원)
사실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은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책 “대한민국의 기원: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 정세와 민족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의 저자인 이정식 교수는 해방 직후 한반도 내 조선공산당의 급진성과 미성숙, 인민공화국 설립으로 인해 좌우 대립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증폭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증폭된 대립과 갈등은 민족의 분열과 분단을 초래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좌우대립에 대한 비판
동의대학교의 주봉호 교수는 당시 좌우 대립은 우리 민족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합의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감정적으로 대처한 결과로,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합의 내용 중 ‘임시민주정부 수립’이 ‘신탁통치 결정’보다 더 중요하였음에도 이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봉호 교수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은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상 분위기를 깨뜨렸으며,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반탁 운동에 편승하면서 일명 ‘애국자 행세’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은 한반도를 둘로 나눈 외세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 민족을 더욱 단합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반탁 운동과 찬탁 운동이 반공·반소운동과 반미운동으로 연결되고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격화된 국제정세와 맞물리면서 우리 민족이 분단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민족의 힘을 모으고 외세를 극복하여 통일된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도 세력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운동이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남한의 단독선거를 통한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는 김구, 김규식과 같은 민족 지도자들의 노력도 있었습니다.
③편에서는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 속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한 민족 분단의 위기, 이에 맞서 민족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좌우합작운동이라는 민족지도자들의 노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3화 보기>
이전 기사에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 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내용 중 하나인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좌우대립 격화 등의 정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내용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휴회 되고 민족 분단의 위기가 드리우는 가운데에 이를 해소하고자 했던 민족 지도자들의 노력인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와 무기 휴회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어 가던 중 1946년 3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됩니다.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구성하기 위해 미군정과 소련군정 사이 개최된 첫 번째 회의에서 양측은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주체, 즉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어떤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주체까지 포함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소련군정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 반대하는 주체들과의 협의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였습니다.
당시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 세력은 대부분 우익이었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세력은 좌익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우익 세력들을 대부분 배제하자는 소련군정 측의 주장은 미군정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군정과 소련군정 양측의 이견은 좁혀지지 못하였고, 결국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 무기 휴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 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사진: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무기 휴회 되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남북의 두 지도자: 이승만과 김일성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진 후 소련군정의 후원으로 1946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됩니다. 김일성은 한반도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민주기지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민주기지론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상황을 감안하여 우선 한반도의 북반구에서만이라도 이른바 ‘민주기지’를 튼튼히 세워 이후 한반도의 남쪽으로까지 이를 확장하여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 지역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당면과업으로 제시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반대로 남한의 이승만은 1946년 5월 소위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신탁통치로 좌우익의 대립이 거세지고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로 미소 간의 협상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흘러가던 때에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주도로 개혁이 이루어지고 남쪽에서는 이른바 ‘단정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는 만약 이대로 간다면 분단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점차 증폭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중도 세력들은 좌우익을 통합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다시금 통일정부 수립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펼쳤습니다. 바로 좌우합작운동입니다.
좌우합작운동
1946년 5월부터 한반도에서는 중도 좌익이었던 여운형과 중도 우익이었던 김규식과 같은 중도 세력들의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년 7월 민족의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몽양 여운형(왼쪽·ⓒ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과 김규식(오른쪽·ⓒ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은 이러한 좌우합작위원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습니다.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른 통일된 임시민주정부의 수립,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 등을 내용으로 한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습니다.
①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③ 토지개혁 실시, 중요산업 국유화,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 추진
⑤ 남북의 정치운동자 석방 및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 제지 노력
⑥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방안 모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 절대 보장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좌우합작위원회라는 명칭과는 달리 중도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좌우익 세력들은 이탈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 간의 합작을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미군정도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였고 좌우합작위원회는 제대로 된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좌우합작운동에서 이탈한 좌우익 세력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며 통일정부의 수립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좌우합작위원회 위원들(사진=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한반도에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
일제가 패망한 후 해방된 한반도에서는 본래 강대국들의 약속과 우리 민족의 염원에 따라 독립된 자주 국가가 세워짐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 사항을 두고 벌어진 우리 민족 내부의 대립,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간에 합의의 불발로 인해 일시적인 분할점령의 상태가 분단국가 수립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분단의 그림자’가 점차 드리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도 세력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벌어졌으나, 대립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좌우익 세력들이 이탈하며 오히려 민족통일을 위한 합의 기반 형성에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는 이후 미소 냉전의 심화로 인해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며 더욱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④편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여운형의 암살로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실패하게 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어 남한 지역에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 정세와 민족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 일조각.
주봉호. 2014. 제2장 한반도 분단의 대내외적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4(1). 47-97.
[출처]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②]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좌우대립|작성자 대한민국 통일부
[참고 자료]
김국후. 2008. 평양의 소련군정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비록). 한울아카데미.
박태균. 2021. 버치 문서와 해방 정국: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역사비평사.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 정세와 민족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 일조각.
주봉호. 2014. 제2장 한반도 분단의 대내외적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4(1). 47-97.
[출처]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③]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와 좌우합작운동 그리고 남북의 두 지도자|작성자 대한민국 통일부
[참고 자료]
노경덕. 2016. 얄타 회담 다시보기. 사총. 87. 317-349.
윤영휘. 2017.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군의 군사전략과 전후 국제질서 구상. 군사. (105). 257-286.
이완범. 2005. 트루먼과 동북아 냉전: 미국의 원폭실험 성공에 따른 소련의 대일전 참전배제 구상, 1945년 4월~1945년 8월. 미국사연구. 21. 69-103.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 정세와 민족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 일조각.
정병준. 2014.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107). 307-347.
주봉호. 2010. 한반도 분단의 성격 = 대내외적 요인. 통일전략. 10(3). 321-354.
[출처]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③]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와 좌우합작운동 그리고 남북의 두 지도자|작성자 대한민국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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