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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쿤밍에서 메리설산 염정까지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1. 2. 23. 15:58

중국 쿤밍에서 메리설산 염정까지

 

더친 가는 길에 보이는 산을 돌아가는 강줄기

 

더친 가는 길의 백마설산 전망대(해발 5000미터 고지)

 

제 10일 밤: 페어라이스(飛來寺)마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메이리설산을 마주보는 언덕에, 메이리설산 만큼이나 보기 좋은 하얀 불탑이 15개 이상 나란히 서 있던 곳은 파헤쳐진 체, 대형호텔을 짓는 듯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앞에서 아침이면 동 트는 메이리설산을 바라보며 불을 피우고 합장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불 피우는 탑도 없어져 버렸다. 저녁때의 메이리설산은 꼭대기에 길게 띄 구름을 이고 있어서 그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태워다 준 중국청년 짜파와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하룻밤 40위엔 하는 싸구려 객잔에 짐을 풀었다.

 

페어라이스에서 바라 본 메이리설산의 아침

 

제11일: 싸구려 객잔 안의 어두운 카페에는 술 마시며 카드놀이 하는 중국 젊은이들로 북적였는데, 그들도 내일 메이리설산 안쪽 마을인 위붕(雨崩)으로 갔다가 다음 날 베이스켐프(大本營)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베이스켐프 가는 루트부터 확인하고 내일 날씨에 따라 일정을 정하기로 했다.

 

염정 가는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옛날의 차마고도

 

 

아침에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고 나오니, 어제 우리를 태워다 주고 더친으로 돌아갔던 짜파가 약속시간 보다 30분이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정을 조금 바꿔서 그와 흥정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 동안 꼭 보고 싶었던 염정을 먼저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 오늘 염정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2) 다음 날 돌아와서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 가는 길의 마지막 마을 시당(西堂)에서 다시 하룻밤 자고, (3) 그 다음 날 위붕으로 올라가서 하룻밤, 베이스켐프 다녀와서 다시 하룻밤 자고, (4) 마지막 날 더친(德欽)까지 태워다 주는 조건으로 총 1,000위안에 계약하였는데, 너무 싼 값에 성사되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간의 숙식비는 우리가 부담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다른 파오처(包車)의 값을 알아보았는데 가는데 까지 500위엔을 부르며 그 이하는 안 된다고 딱 거절했었던 것이다.

 

윈난성 북부의 산은 거의 이런 모습이어서 바위와 토사가 한 없이 흘러내린다.

 

 

염정 가는 길의 시작은 좋았다. 한 동안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공사 중인 구간이 나오더니 염정 거의 다 갈 때까지 그 모양이었다. 산비탈에서는 계속 바위와 자갈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으며, 아예 길을 막고 공사하는 데도 여러 곳이었다. 길은 페어라이스에서 계속 내리막이다가 강을 따라 이어지면서 평지를 달리기도 했다. 강 건너편 산비탈에는 산사태로 여기저기 끊긴 채 남아있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보였는데, 저 것이 그 “차마고도”란다. 그러나 말까지 매달아 강을 건너게 하던 그런 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찻길은 강을 따라 이어져 있다.

 

위난성 관할이 끝나는 마을에 길을 막아 놓고 통행을 통제하는 공안사무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시짱성(西藏省)인 염정에는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쪽에서 사정해 보겟다”고 하여 통행을 허가받았다. 20여분 달려서 다시 좋은 길이 나오는가 싶었더니 그 곳부터 시장성이었던 것이다. 입구에 문을 세워 경계를 알리고 있었는데, 중국인들도 차를 세우고 쉬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염정 마을 입구의 검문소 - 누구나 검문을 받고 들어간다.

 

 

다시 10여 분 좋은 길로 달리니 염정이 나타났는데, kbs에서 방영한 차마고도에는 보이지 않았던, 현대식건물이 들어 선 작은 도시를 보고 실망이 앞섰다. 공안은 한 참이나 내 설명을 듣더니 통과는 물론 숙박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권을 맡기고 2-3시간 머무는 조건으로 통과하게 되었는데, 짜파도 이곳이 처음이었는지 여러 사람한테 물어 염정마을을 찾아가게 되었다. 길은 마을의 작은 골목으로 빠져서 물이 빠르게 흐르는 계곡까지 돌고 돌아 내려가는데, 역시 파라빌리지 가는 길 만큼이나 위험했다. 가다가 다른 차라도 마주치면 비켜 설 틈도 없었다. 보고 싶었던 염정은 그렇게 20여분 내려가니 나타났다.

 

 

염정의 강 이쪽 

 

염정에는 건기인데도 소금밭이 여러 곳 비어있었으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곳도 보였다. 두세 군데에서 아낙들이 나와 밭을 만들고 물을 대는 데, 전에 본 것처럼 양동이로 나르지 않고 호스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밭은 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석라래를 얹어 판자를 놓은 다음, 붉은 흙을 두껍게 깔아 만들었는데, 석가래 사이로 흘러내려 굳어진 고드름 같은 소금이 가장 좋은 품질이라고 하였다. 맑고 하얀 빛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제 막 손질하는 밭도 있고, 소금물이 채워진 밭도 있고, 하얀 소금이 말라있어서 반짝거리는 밭도 있었다. 일하는 여인들도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고 나름대로 멋 부린 치장이었다.

 

저수조에 물을 채우는 아낙들

 

 

염전은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강 건너에는 붉은 산 밑에 작은 초원이 있어서 그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도 보였으며, 강 상류 쪽에 이 쪽 보다 더 큰 염전이 있었다. 고드름 소금을 보고는 조금 사온다고 맘먹었었는데, 사진 찍느라고 바쁘게 움직이다 그만 잊어버리고 왔는데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드름 소금

 

막 걷어 낸 소금

 

돌아오는 길에 산사태가 나고 그 먼지가 폭풍처럼 계곡을 매웠는데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차가 지나갈 때 산사태가 났더라면 그 속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찔했다. 산비탈 길 아래 여기저기에도 산사태로 토사가 길게 흘러내린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곳도 보였다. 밤길은 더 위험할 것

같아 시간을 재촉하여 돌아와야 했다.

 

염전 바닥에 흙을 바르는 여인

 

 

사진의 저 위쪽에 올라가야 할 도로가 있고 산사태는 계속 일어난다

 

 

메이리설산 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시당(西堂)은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입구에서 보험료 포함 공원입장료 85위엔(노인은 45위엔)을 내고 들어가서도 밍용빙천(글라시아) 반대방향으로 산자락을 돌고 돌아 3-40분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짜파가 안내하여 준 집에 방을 얻어 짐을 내려놓고, 함께 길고 고달픈 여행의 피로를 풀기위해 중국에서 맛 들인 다리맥주를 마셨다. 그 집의 절방 같은 넓은 거실에 판을 벌여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먼저 그 집 스물두 살 먹은 예쁜 딸이 시작하여, 짜파와 그 동생 순지, 그리고 우리들까지 차례로 저마다 멋을 부리며 노래를 불렀다. 순지의 노래실력은 대단했다. 가수의 기질이 엿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부르기 힘든 “샹그릴라”를 열창하였고 랩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가수다운 실력이었다.

 

이 날 저녁 한판의 놀이로 우리는 다음 날부터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나는 벌써부터 착한 마음씨를 지닌 짜파네를 한국으로 초대할 생각을 굳혔다.

 

 

 

제12일: 다음 날 아침 역시 일찍 찾아 온 짜파의 차를 타고,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로 들어가는 마지막 채크포인트 온천으로 갔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입장권 검사를 받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등산로 입구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여러 필의 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산 고개인 야크까지155위엔 이었다. 잘 모르는 길이라 말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나와 친구는 곧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말이 우리 걸음보다 더 느렸으며, 여자들인 마부들도 여간만 힘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길엔 두세 곳의 간이휴게소가 있어서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짜파동생 순지가 그 중 한 곳의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먼저 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만든 도넛 같은 빵을 내 놓는 것이었다. 배도 고팠지만 그 맛도 좋았다. 그 휴게소부터는 눈이 많이 쌓여있어서 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질컥거리기도 했다.

 

야크고개에서 바라 본 메이리설산

 

 

다시 한 시간 쯤 올라가자 훤히 트인 고개가 나타났는데, 눈부실 만큼 하얀 가운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치고 있는 메이리설산 한 쪽이 하늘 높이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침 날씨도 맑았는데, 우리는 그 아름답고도 웅장한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어라이스에서 바라 보았던, 물고기 지느러미 같이 생긴 설봉과 끝이 뾰쪽한 설봉이 나란히, 바로 코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쉼터 한 쪽에는 3층 높이의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아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셔터 누르기에 바빴다.

 

야크고개의 타르쵸

 

야크고개에서 짜파 그리고 마부아줌마들과

 

한 참 쉰 다음 말을 돌려보내고, 잘 다음어진 내리막길로 한 시간 쯤 걸으니 분지 같은 지대에 위붕마을이 나타탔다. 위붕은 상촌과 하촌이 있는데, 우리는 20여 호 쯤 되어 보이는 상촌의 짜파네 산장에 짐을 풀었다. 가까이에 예쁘게 지어진 건물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초등학교였는데, 혼자 두 반을 맡아 가르친다는 처녀선생이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방명록을 가지고 나와, 한글로 쓰인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작년에 EBS 촬영팀이 다녀가면서 메모를 남긴 것이었다. 반가웠다. 나도 다시 와서 한 동안 머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의 글을 남겼다. 다행히 또 온다면 그 때는 아이들에게 줄 노트 등 학용품을 배낭 가득 짊어지고 와서 저 예쁜 선생님까지 기쁘게 해 주어야지...

 

위붕마을

 

짜파네 산장은 2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아래층은 그냥 넓은 공간으로 남아있으며, 부엌과 손님방은 사다리로 올라가는 2층에 있었다. 그런데 방을 제외하고는 문이 없는 마치 커다란 오두막 같았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아궁이에 불이 타고 있는 부엌 앞에 앉아있어도 추웠다. 7-8개 쯤 되는 방에는 햐얀 시트가 깔린 침대가 두 개 또는 세 개 씩 있고, 이불도 깨끗한 것이었다. 단지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 조금 불편하였으나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공급하여 주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위붕마을 뒷편 메이리설산 베이스 켐프 들어가는 초입

 

 

2층 터진 베란다에 나와 짙은 안개 휘감기는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신비스러운 별세계 아니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깊고 높은 산 속의 아담하고 고요한 마을, 자동차 소리도 없고, 비행기 소리도 들릴 수 없는, 자연도 사람들도 때 타지 않은 그런 마을이다. 좁은 골목길은 말과 소들이 어슬렁거리고, 산 밑 밭에는 한 무리 돼지 떼가 야생상태나 다름없이 뛰놀고 있었다. 맑은 바람소리와 그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도 하나같이 바쁘지 않게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같이 든 중국여인들이 취사를 도와서 장만한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또 밤늦게까지 칭거주라는 독한 술도 마시며 즐거운 산속마을 위붕의 첫 날 밤을 보냈는데, 당연히 흥겨운 노래가 따랐다. 역시 밤에 내려온 순지가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다. 나는 우리민요 “도라지타령”과 가요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불렀다. 나는 그 곳에 오다가 만난, 장춘에서 왔다는 중국여인 미세스 두와 친한 친구가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녀는 샹그릴라에 작은 호텔을 하나 사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더 맘에 들었다.

 

짜파네 산장의 앞뜰

 

 

제13일: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어제 밤까지도 하늘에 별이 총총했었는데 말이다. 비는 가끔 눈이나 진눈개비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간단한 옷차림으로 베이스켐프를 향해 출발했다. 등산로 입구에 2월부터 4월은 폭설 때문에 입산을 금한다는 표지판이 있었으나 우리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숲은 생각보다 울창하고 아름드리 고산목들이 뿌리까지 뽑혀 넘어져 있기도 했다. 말을 타고 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어느 구간은 “말을 타세요”, 또 어느 구간은 가파르니 “말에서 내리시오” 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 부터 따라온 하얀 삽살개 한 마리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가는데 내려올 때까지 우리를 안내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다. 네팔 안나푸르나를 오를 때의 검둥이 생각이 났다. 

 

나무에 붙은 거대한 혹

 

 

산에는 여기저기 붉은 색 중국철쭉이 피어있는데 아직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활짝 웃는 모습이 아니고 조금 쳐진 모습이었다. 잎도 마찬가지였다. 질컥질컥한 길을 한 시간 여 오르니 눈밭이 나왔는데, 먼저 올라갔던 중국청년들이 내려오면서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눈 깊이가 50cm쯤 되고 가파르다면서. 그래도 우리는 힘들여 올라 온 시간이 아까워 계속 길을 찾아 가 보았는데, 산비탈을 반 바퀴 쯤 돌아서니 고개가 나타나고 오색 빛깔로 펄럭이는 타르쵸가 보였다.

 

 

언덕을 다시 돌아 내려가니 눈바람 속 건너편, 흰 눈이 길게 깔린 산자락에 작은 건물 몇 개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금방 저 곳이 베이스켐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려가서 개울을 건너고 4-500미터 쯤 더 가면 닿을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눈발이 거세지고 시야가 흐려서 좋은 경치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내려가지 않기로 하고 그만 돌아섰다. 메이리설산 베이스켐프는 위붕에서 출발하여 천천히 걸어도 3시간쯤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보면 된다. 이 정도의 코스를 위험하다고 돌아 선 중국청년들을 보고 나는 그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려오는 길은 상대적으로 쉬워서 한 시간 반 걸렸다.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메이리설산 시베이스켐프(大本營)

 

 

저녁 때 쯤 되니 짜파의 두 살 터울 형이 두 부인을 데리고 나타났다(부인이 셋이라고 했다). 내일 짜파가 우리랑 같이 내려가니 대신 산장을 지킬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이다. 여자들이 오니 부엌부터 깨끗해지고 온 집안이 말끔해 졌다. 이 날 저녁부터 짜파가 만든 이상한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독한 칭커주에 계란을 풀어 뜨겁게 데운 것과, 닭고기를 잘게 토막 내어 칭커주에 푹 끓인 것이 그 것이다. 몸에 좋다고 권하는데 먹다 보니 여러 그릇 해치웠다.

 

베이스켐프 가는 길의 숲

 

그날 밤 9시부터 우리는 마을 청년들이 손님을 위해 배푸는 춤공연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민속무용은 머무는 곳 마다 볼 수 있었는데, 이 곳 주인은 손님에게 칭커주 까지 계속 따라주며 억지이다 시피 권해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작은 마을이지만 아래 위 마을 청년들이 다 모이니 5-60여명 되는 것 같았다. 여성들도 곱게 차려입고 나와서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좋고 박자가 잘 맞는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정집 거실인 좁은 공간에서 연통도 없는 화로에 불을 피우고, 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구 담배를 피워대기 때문에 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슬그머니 나와서 밤하늘의 손에 잡힐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제 14일: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2박 3일 숙박 및 식사비로 200원씩을 거두어 주었다. 너무 많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주고 서둘러 배낭을 꾸린 뒤 위붕을 출발했다. 물병이 든 배낭을 짜파가 매고 앞서 올라 간 바람에 나는 목이 타서 죽을 뻔 했다. 그제 내려 올 때 쉬웠던 길이 오늘 올라가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야크고개에 이르러 다시 메이리설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며 맘껏 기를 받아 충전시킨 다음 빠른 걸음으로 하산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그제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위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 마다 짜파네 산장을 소개하여 주기를 잊지 않았다.

 

위봉에서 돌아오는 길

 

 

시당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짜파네 집에 들러 간단한 점심을 얻어먹었다.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의 농장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밭에서 일하는지 보이지 않고 어머니가 음식을 장만하여 내 놓는 것이다. 역시 티벳족 전통가옥으로 거실은 매우 넓었으며, 앞쪽 벽에 마오쩌동과 불교지도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우리는 그 날 오후 짜파의 짚을 타고 더친까지 와서 숙소를 구한 다음 그들 형제와 마지막 저녁을 같이 먹었다. 다리의 명물인 메기매운탕을 먹었는데 우리의 메기와 비슷한 맛이었다. 내가 짜파네 형제에게 중국아들로 삼고 싶다고 청하니 좋다고 하여, 우리는 이국간 부자지간의 의를 맺었다. 그들은 날 한국아버지(한구어 파바)라고 부르고, 나는 그들을 중국아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제15일: 아침 6시 반에 버스터미널에 나가 샹그릴라 가는 첫 버스 티켓을 사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나와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먼저 사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서툰 중국말로 그들에게 차례로 설 것을 주문하여 한 줄로 세운 뒤 표를 팔도록 하였다. 한국 사람이 중국 오지에 와서 군기(?)를 잡은 셈이다. 그 들 중에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환영하는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버스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중국인한테 두통이 심하니 피우지 말라고 하니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

 

 

 

 

샹그릴라로 돌아오는 날에는 날씨가 좋아서 메이리설산과 백마설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버스기사는 내가 아들 삼은 짜파의 친구였는데, 우리를 위하여 메이리설산 전망대 앞에 차를 세워주기까지 해서 퍽이나 고마웠다. 역시 메이리설산은 멋있는 산이다. 외국인을 포함,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찾아 올 만큼 유명한 산인데, 나도 두 번이나 왔지만 다시 또 와 보고 싶은 멋있고 우아한 산이다.

 

 오른쪽 계곡에 밍용빙천(빙하)이 보인다

 

샹그릴라로 오자마자 나는 매표소를 찾았다. 하바설산 쪽 가는 버스가 있으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표를 사기위해서이다. 마침 20분 후 백수대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표를 끊고 차에 올랐다. 백수대나 하바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호도협을 건너 백수하 등 옥룡설산 풍경구를 구경하면서 리지앙으로 돌아 갈 계획이다.

 

작은 버스를 타고 샹그릴라 외곽의 한적한 시골길을 빙빙 돌아 먼저 도착한 백수대는 물도 말라있고, 다른 볼거리도 시원찮았으며, 맘에 드는 숙소는 텅 비어있으면서 가격이 비쌌다. 우리는 우왕좌왕하다가 마침 하바까지 가는 버스가 오기에 올라타고 말았다. 하바에 도착하자 정류소 앞 집 객잔 여 주인이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 배낭을 짊어지고 앞장서더니 자기 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프랑스 단체관광객 20여명이 편하게 쉬고있었다. 하바설산을 오르려고 왔다는 것이다.

 

나시족 민속춤과 노래 공연

 

주인여자는 나시족인데 여우같았다. 마당 건너 별채 방으로 안내하더니 방값을 120위안이나 부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어 온 가격이 있기 때문에 깎고 또 깎아 2인실 하나에 80위안으로 매듭지었다. 다른 곳에 비하면 40위안짜리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입조심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일단 온수가 나와서 샤워부터 하고 저녁은 한국에서 가져 온 라면을 마지막으로 털어 끓여 먹었다. 밤에는 그 마을 여인들이 총 동원되어 나시족이 노래를 부르며 추는 민속춤을 보여 주었는데, 젊은 여인들의 옷은 더욱 화려했다.

 

 

하바에서 바라 본 하바설산

 

제16일: 하바설산 오르는 일은 2박 3일쯤 걸리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침에 그 집에서 끓여주는 짜디 짠 국수를 먹다 말고, 마침 손님을 찾고 있는 파우처를 발견하여 흥정을 했다. 호도협 올드 패리까지 120원이라고 해서 올라탔다. 그런데 가까운 줄 알았던 호도협은 두 시간 반도 더 걸렸다. 길은 잘 포장되어있었으며, 꾀 높은 산허리를 돌아 달리기 때문에 하바설산은 물론 건너편 옥룡설산까지 다 드러나 보였다. 산 고개에서 잠간 내려 전망을 살피니 저 멀리 동쪽에 그리운 야딩의 선네일 신산 등이 보이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야딩에는 선네일, 앙메용, 하나답길의 6000미터 봉 3좌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번에 그 곳까지 코스를 잡았으나 동티벳탄 사정이 험악하여 외국인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해서 뺀 것이다.

 

호도협 끝자락 평지-멀리 희미하게 야딩이 보인다

 

차는 올드패리 가까운 언덕위에 세워주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30여분이나 땀 흘리며 위험한 비탈길을 따라 가까스로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일이었으나 한 편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뛰어 건넌다는 말처럼 좁디좁은 협곡 호도협의 안쪽에 이처럼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 이편저편에 넓은 토지가 깔려있고 큰 마을도 있었다. 이곳에서도 야딩은 계곡 저 끝에 아스라이 보이고 있었다.

 

호도협 진사강-왼쪽 언덕에서 비탈길로 아슬아슬하게 내려와야 한다

 

 

한 참 기다리니 현지인 3-4명이 더 오고 곧 저쪽에 꿈적도 않던 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배삯은 25위안이었다. 호도협은 장강의 지류인 진사강의 물줄기이다. 치어터우 쪽에서는 물살이 매우 빨랐는데 이곳에서는 배가 지날 만큼 폭도 넓어지고 느려진 것이다. 산은 아니지만 아직도 양쪽 언덕이 높이 쳐다보이는 깊은 계곡이다. 그래서 배에서 내리고도 그 쪽 언덕을 오르려면 다시 힘을 빼야 할 것이었는데, 마침 같은 배를 탔던 현지인의 제안에 따라 그들에게 짐을 맡기고 우리는 빈 몸으로 올라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 올라와서는 처음 약속한 돈에 조금 더 얹어 주어야 했다.

 

호도협 진사강을 건너와서

 

 

언덕에서 조금 더 오니 정원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객잔이 있었다. 손님으로는 외국인 젊은 남녀가 점심을 시켜 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리징앙으로 가고 조금 나이가 더 든 남자는 샹그릴라로 간다고 했는데 둘 다 그 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조금 쉬었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파우처를 280위안에 빌려 리지앙으로 떠났다. 하루 밤쯤 쉬어 갈 수 있는 객잔이었으나 리지앙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따주 객잔 정원에 만발한 꽃

 

 

리지앙 가는 찻길도 공사 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중국은 전 국토가 공사 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은 조금 털털거리기는 해도 참으로 멋진 여행길이었다. 아름다운 설산 옥룡의 모든 것을 다 보며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옥룡만큼 높은 산비탈을 수없이 돌고 돌아 꼭대기에 이르니 옥룡의 멋진 봉우리들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길은 옥룡의 한 끝에서 다른 한 쪽 끝까지 죽 따라가면서 이어졌다. 옥룡의 자락에는 평화로운 마을도 있었지만 여러 곳에 관광지가 조성되어있어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밤에 보았던 리지앙 구성거리의 중국인들이 낮에는 이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백수하와 옥룡설산

 

백수하 큰 못

 

우리는 따로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그들이 구채구나 황용처럼 꾸몄다고 하는 백수하를 둘러 볼 수 있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그 곳 물빛 하나는 끝내주었다. 그 상류로 올라가면 좋은 계곡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좋은 곳도 보고 왔지 않았는가 말이다.

 

 

리지앙으로 들어오는 길은 넓고 시원하게 뚫렸는데, 내가 달려 본 길 중에서 일직선으로 이처럼 길게 난 길은 처음이다. 무려 10km이상 일방통행으로 건설된 평지의 직선 길을 달렸다. 신시가지에 들어오자 도로 양쪽에 멋진 주택단지가 조성되어있었는데, 단지마다 각기 다른 건축양식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우리나라 관계자들도 좀 따라 배웠으면 하는 맘 간절했다. 년 중 따뜻한 날씨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아름다운 거리가 있고, 아름다운 마을과 집이 있고, 또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노력만 하면 돈벌이도 쉬울 것이니 리지앙은 참으로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요즘 한국의 많은 은퇴자들이 외국으로 이주하고 있다는데, 리지앙이나 샹그릴라도 그 좋은 대상이 아닐가 한다. 중국이 은퇴이민을 받아준다면 말이다.

 

수허고진의 고즈넉한 모습

 

 

구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수허고진에 들렀는데, 구성 못지않게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음식점도 다양하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시가는 한 마디로 휴식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아주 편한 자세로 여유로움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파오처 기사는 이곳을 작은 고성이라고 설명했다.

 

 

파오처 기사는 또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는데, 고성에서 80위안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호텔의 표준 방과 같은 급의 방을 40위엔에 얻어 주었던 것이다. 고성 외곽에 있었지만 새로 지은 버스터미널에서도 가깝고 조용해서 좋았다. 고성의 만고루가 쳐다보이는, 고성입구에서는 정 반대편이다. 이처럼 고성을 조금만 벗어나면 방값은 훨씬 싸다.

 

 

다수의견에 따라 내일 아침 차로 쿤밍으로 직행하기로 하여 호화고속버스표를 각각 214원인가에 끊고 오는 길에 맛사지 집에서 발의 피로를 풀었다. 혼자라도 가보고 싶었던 루꾸호는 포기했다. 리지앙에 다시 들리면 보기로 했던 흑룡담도 잊었다.

 

 

 

제17일: 9시 반 출발하는 2층 버스의 2층에 자리 잡고 리지앙을 떠나는데, 도시를 벗어나면서 보이는 농촌의 모습도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다리에서 보아 온 깨 밭이 이어져 있고,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모습, 못자리를 하는 모습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중간 지점에 쉬면서 점심까지 제공해 주었다. 오면서 항공사에 전화하여 쿤밍 발 비행기 시간도 앞당겨 출발하도록 조치하였다.

 

 

쿤밍에 들어서면서, 택시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태양열전지판이 아파트 지붕마다 빈틈없이 설치되어있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이런 것도 따라하지 할 줄 모르나?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공직자들이 해외출장을 다녀온다는데 과연 무엇을 배우고 오는지? 아시아에서 가장 어렵게 산다는 네팔의 히말라야 산속에도 집집마다 태양전지는 필수였다.

 

 

제18일: 한스네에서 하루밤을 더 자고, 오늘은 밤 11시 반쯤 공항으로 가서 내일 아침 02시 뜨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한스 민박집은 근처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집이 있어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좋았으며, 가까운 곳에 월마트가 있어서 생필품이나 선물을 사기도 좋았다. 보이차를 사려고 굳이 시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 곳에 가면 원하는 것 다 있었다. 유명상표가 붙은 1년 숙성 보이차 한 덩어리(500g)에 우리 돈 18,000원에 샀는데, 덤으로 2년 숙성된 작은 포장의 보이차를 하나를 더 얻게 되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석림의 다른 모습

 

 

리지앙의 민속무용

호도협 나시페밀리 게스트하우스

 

샹그릴라 장족 민속춤 

 

샹그릴라 구성거리

염정 가는 길의 시장성 입구를 알리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