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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하강서원(荷江書院)]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2. 28. 18:24

 충주[하강서원(荷江書院)]

 


[하강서원(荷江書院)]

위치 : 금가면 하담리

소유 : 풍산 홍씨 종중

규모 : 목조 1동,정면 3칸×측면 2칸(8.23평),팔작지붕

시기 : 서원건립(1786년), 서원철폐(1871년), 하강단소 설치

(1907년), 하강서원 재건(1974년)

조선 선조 때의 명신 홍이상(1549~1615)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10년(1786)에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은 후, 하강서원 내에 다시 광무11년(1907) 하강단소를

만들고 유림들의 제사가 이어오다가 1974년에 사당을 건립하여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1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하담 추월이라는 충주 8경의 하나로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이기도 한데

먼저 밖에서부터 살펴보면 입구에 소슬3문이 있고 하강단소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8.23평이다. 길게 다듬어 만든 돌로 기단을 만들고 둥근 주초석을 놓아 앞은 둥근기둥,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생략되고 간결한 양봉만을 건물의 안과 바깥 방향으로

연결하였으며 창방으로 이어진 기둥 사이에는 3개의 소루가 놓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는 전방 퇴주와 후방 평주 사이에 내고주 대신 평주를 세우고 대들보와 마룻대가 되는 보를

걸었으며 그 위에 체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오량집으로 문은 사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를 달았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하강서원의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은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의 3칸에는

넓은 우물마루의 대청을 두었고 양쪽의 1칸씩에는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대창과 온돌방

사이에는 사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를 달고 대청의 뒷쪽에는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구조는 낮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에서 볼 때 가운데 3군데만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뿔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네모 기둥을 세웠는데 윗부분에는

공포와 창방을 생략하고 간략화된 양봉만을 건물 안과 바깥 방향으로 연결하였다.

 

가구는 앞 뒤 평주 위에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작은 기둥을 세워 종량을 이었는데

종량 윗 부분에 체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오량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한 쪽이 떨어져 나간 문짝

 

홍이상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초명은 인상(麟詳)이라 하였으며,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며 본관은 안동 풍산이다.
부사직 홍수(洪修)의 아들이며, 민순(閔純)에게 학문을 배웠다.

선조 6년(1573) 소과에 합격하고, 12년(157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 수찬(修撰), 지제교,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 독서당에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정언, 수찬 직 등을 거쳐 문신으로서 더욱 자긍심을 갖게 했던 사가독서
(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
영예도 누렸다.

이 때 일송 심희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함께 참여했다.
또한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경서를 교정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때는 모당이 36세가 되었을 무렵으로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아본
율곡 이이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뒤이어 집의(執義), 응교를 거쳐 태복사정(太僕寺正)이 되고 사간, 사인을
지내고 황해도 안무사가 되었다.

24년(1591)에 직제학, 동부승지,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예조참의로써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서경까지 가서
부제학이 되었다가 성천에 도착하여 병조참의가 되었다.

모당이 벼슬했던 당시 광해군 1년 때의 조정의 주요 관료에는.....
영중추부사로 한음 이덕형, 영의정에 오리 이원익, 좌의정에 백사 이항복,
우의정에 일송 심희수, 병조판서에 월사 이정구, 공조판서에 추포 황신,
동부승지에 이이첨이 있을 때 모당은 대사헌 직에 있었다.

참으로 쟁쟁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로 추앙을 받았던 15년 후배인 월사 이정구와는 인척간이기도 하다.

현판 안내문이 훼손되여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홍이상 졸기(卒記)를 보면, 그가 최고의 ‘강관(講官)’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관이란 경연(經筵)에 입시(入侍·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여
임금에게 경전을 지도하던 임무를 담당했던 관원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식과 교수 방법을 지녔던 신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다.
모당은 강관 중에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니 그가 학문에도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예조판서를 아홉 번이나 지내고 40년간이나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으며
붓을 잡기만 하면 문장이 되었던 월사 이정구조차 이러한 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일파에 몰려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좌천되어
갔다가 병들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 물가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文敬)이라 시호하였다. 부조묘인 하강사와

그의 묘소(墓所)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성석리에 있으며,

이정구(李廷龜)가 찬한 신도비가 있다.  

주시 금가면 하담리(荷潭里)에 하강서원(荷江書院)에서도 제사지내고 있으며,

서원의 서쪽 강가에 후배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기 위해 세운 모현정(慕賢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저서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충주시내에서 목행대교를 지나면 왼쪽으로 공군부대 진입로가 있다. 그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직진하여 조금 더 가면 왼쪽으로 금가 입구 표지판이 나온다. 좌회전하여 10여분간(차량거리) 직진하면 남한강이 보입니다. 이 마을이 하소이다. 여기서 2시 방향쯤을 보면 하강서원이 있다. 하강서원에서 다시 더 들어가면 왼쪽으로 모현정이 있다. 유물산포지는 그 길을 따라 가면 강가에 닿는데 그 지역과, 하소마을 앞 강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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