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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명소 충주탄금대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1. 29. 16:38

충주탄금대

 

 

 


탄금대는 충주시 서편 칠금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번국도를 따라 충주시로 들어오다보면 철길을 넘어가는 고가도로 밑으로 충주시가 펼쳐지면서 사거리가 나옵니다.이곳에서 우회전을 하시고 충주역을 거쳐 바로 앞에 첫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시면 칠금동으로 들어서게 됨과 동시에 탄금대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또한 중앙탑공원과 중원고구려비 유적자를 방문하실 수 있으며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이어집니다.


                                                              충혼탑

 

 6.25전쟁 떄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우리 고장 선열들의 충성스런 마음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1955년 11월 사단법인 충주·중원 상이용사회에서 높이 850㎝의 탑을 건립하여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경찰의 영혼을 모셨다. 현재도 현충일이 되면 행사를 갖고 있으며, 탑의 몸체에 새겨진 충혼탑이란 글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글씨이다. 그리고충혼탑옆에 임진왜란 당시 장렬하게 순국한 장졸들을 위한 팔천고혼위령탑이 있어 보는이에게 엄숙함을 더하게 하여준다.

 

                                                                           감자꽃노래비

  충혼탑 북쪽으로 1968년 5월 5일에 제막한 높이 323㎝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이 노래비는 항일 시인 권태응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 글은 일제 치하의 항일 정신이 깃든 동요이다.  권태응 선생은 1918년 충주시 칠금동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은 안동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1932년 충주공립보통학교, 1937년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항일 독립운동 활동을 하여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고 1학년도 마치지 못한 채 퇴학당했다. 퇴학한 후에는 독서회를 조직하여 재일 유학생들을 모으고 항일운동을 좀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다가 1939년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폐결핵으로 이듬해에 감옥나오게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고향 충주에 내려와 농장생활을 하면서 야학 등을 통하여 꾸준히 항일 운동을 펴왔다. 특히 일본 경찰의 감시와 질병 속에서도 고추밭, 율무, 옹달샘, 감자꽃 등 많은 항일 애국시 등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하였다. 그 중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본 천황의 국민으로 삼으려는 계획으로 우리의 성(姓)을 없애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에 저항한 작품〈감자꽃〉을 지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광복을 맞이하고 6.25 이듬해인 1951년 3월 당시 34세로 별세했다.  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에 윤석중 선생 등의 후원으로 고향인 충주 탄금대에 〈감자꽃〉노래비를 세웠다. 충주 문인협회에서는 매년 10월에 권태응선생을 기리기 위한 「감자꽃 백일장」을 노래비 앞에서 행하고 있다.

                                                                        탄금대토성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며, 동에서 남으로 다시 서쪽으로 형성된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모양의 물줄기에 의하여 본래는 섬처럼 고립된 곳으로 전쟁시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지형이었다. 나중에 남쪽을 휘감은 늪은 제방에 의하여 차단되어 메워져 늪이 되었으나 이 늪의 남북으로 전개된 평지는 탄금대의 방어력과 경제력의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탄금대 토성은 탄금대의 동북쪽 방향에 있으며, 서쪽을 향한 기슭을 에워싸고 있는 일부지역에 형성되었는데 크기는 동서 길이 150m, 남북 너비 100m 정도의 타원형이며 둘레가 400m 정도이다.  토성 및 탄금대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무문토기·간석기(가락바퀴 등)가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이 이미 청동기문화단계에 이르러 집단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 시기의 것으로 두드려 무늬를 낸 (타날문) 토기가 있는데 연한 종류와 단단한 종류가 함께 나오고 있다.  삼국시대 토기로 보통 평행 세로 무늬를 찍고 음각 가로선을 두른 백제 특유의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신라나 가야토기에서 많이 보이는 고배나 장경호류의 토기들이 발견된 바가 없는 점이 특징이다. 만약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였고 6세기 중엽 많은 가야계 주민이 이곳에 옮겨졌다면 당연히 그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다시 한번 생각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로 여겨진다.  탄금대 주변은 자연 지형을 이용한 농업 생산력의 발달, 집단 주거지의 형성, 전쟁시 방어의 편리성 등으로 일찍부터 정치 집단이 형성되었다고 보여지며 그 중심점이 탄금대 토성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의 치열한 전쟁 중에 신립 장군이 활의 열을 식히느라고 수십 척의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하여 열두대라 부른다고 하며, 바위의 층이 12단계로 이루어졌다 해서 열두대라고도 전한다. 이 열두대 입구에 신립 장군 순국지지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에 "선조 25년 4월 28일 팔도 도순변사 신립 장군이 종사관 김여물과 더불어 조총 포화의 수십만 왜적을 창, 칼, 활의 팔천 군사로 맞아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공과 함께 적진에 돌입, 적 수 십명을 격살한 뒤 탄금대 이곳 열두대에서 향년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위국 순절하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신립 장군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명종 원년(1546년)에 신화국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선조 원년(1567)에 2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거쳐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문장가인 진주목사 양응정이 신립의 무인적인 지나친 패기와 자신을 너무 믿는 마음을 학문으로 교정하고자 학문을 공부할 것을 권하여 신립은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시어 배웠다. 선조 16년(1583) 온성부사로 나가, 니탕개가 거느린 야인들을 두만강 건너 그들의 소굴까지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듬해 함경도 북병사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후 니탕개를 잡아죽인 후 신립의 이름만 들어도 야인들이 두려워 도망갔다고 한다.   이러한 공으로 북방 지방은 평화를 되찾았고, 신립이 서울에 왔을 때 왕이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고, 혈흔의 전포(戰袍)를 보고 자기의 옷을 벗어 주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신립의 맏딸이 선조의 넷째 왕자 신성군 익과 혼인하여 사돈지간이기도 하였다.   선조 23년(1590)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로 임명되고 보검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온 국민의 기대를 건 충주 방어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김여물을 부장으로 삼아 유성룡의 군관 80여명과 군사 수백명을 모집하여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진을 치니, 총 병력이 8천 여명이었다.   신립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종사관 김여물을 거느리고 조령(문경새재)으로 나가 지형을 정찰하였다. 이때 이종장과 김여물은 험준한 조령에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은 아군이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임을 고려하여, 말을 달리며 싸울 수 있는 탄금대의 배수진을 생각하고 돌아와 다음날을 대비하였다. 이때 이일이 상주에서 왜군에 패하고 도망 와  신립 앞에 나타나 적의 정세를 보고하였다. 신립은 이일의 패하여 도망 온 것에 대한 처형을 해야 했으나, 군세가 약하고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선봉장으로 삼아 단월을 지키도록 하였다.    왜장 소서행장은 26일 상주를 떠나 문경에서 현감 신원길을 죽이고 27일 새벽에 문경을 떠나 종일 조령을 넘고, 28일 아침에 안보역을 지나 정오 경에 단월에 도착하였다. 이일은 다시 도망치고 적군의 1진은 달천의 오른쪽으로, 또 한 부대는 충주를 불사르고 탄금대를 향하여 삼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군은 새로운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1만 8천 7백 명의 대군이었다. 아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참패하고 신립은 김여물 등과 한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한편 도망친 이일은 충주의 패전을 조정에 알리니, 조정에서는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때 신립의 나이 47세였다. 뒤에 영의정 벼슬을 내리고 충장(忠壯)이라 시호하였다. 충주의 탄금대에는 신립의 순절지지비와 순절비를 세워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순조 32년(1832, 임진)에 신립 등과 함께 충주 달천의 순절한 옛터에서 영령들에게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탄금대사적기

 

    탄금대 북쪽 강 쪽, 열두대 입구에 이르는 곳에 육당 최남선이 글을 썼다는 탄금대기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높이 294㎝, 너비 67㎝, 두께 36㎝로 1953년 7월에 세워졌는데 충주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과 탄금대의 유래 및 충주의 변천과 신립 장군의 순절, 고려 몽고와 침입 때에 김윤후의 활약 등 지난날 충주의 역사를 내용으로 하고있어 오늘의 우리에게 거듭 역사적 사적지로서의 위치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탄금정

 

    광무7년(1903) 충청북도 관찰사 김석규가 현 충주시 교육청 위치에 육각정(천운정)을 건립하였고, 이후 이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겨져 있다가 다시 1955년 읍장이었던 박승두가 탄금대로 옮겨 세웠다. 그 후 1976년에 지금의 탄금정을 세우고 육각정은 1977년에 호암지 동산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탄금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콘크리트 2층 정자로 만들었는데 1층에는 네모 기둥, 2층에는 원형 기둥으로 되어 있고 익공 계통의 공포를 구성하여 지붕과 연결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4모 지붕을 이루고 있다. 1층은 대개의 정자가 그렇듯이 기둥만이 있고  2층에는 난간을 돌려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신립장군순절비

 

     높이  376㎝의 충장공 신립 장군 순절비가 탄금대 대흥사 옆에 1981년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 장군이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등 수십만 왜적을 맞아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전쟁에 패하여 한을 품고 탄금대에서 투신 순절한 내용 등으로,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에 국가적 방비가 없으면 화를 면하기 어렵다는 값진 교훈을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을 전하기 위하여 서번 박재륜이 글을 짓고 유재 김성규가 쓰고 충주시장 김태수가 비를 세웠다.

 

충주문화원

 

   탄금대 대문산 위에 자리잡은 충주 문화원은 1970년 10월에 2층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졌다.  북쪽 반지하에는 매점이, 1층은 사무실, 화장실, 창고, 소회의실을 갖추고 있다. 2층은 바깥벽에 문화관건립취지문과 우륵과 제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안쪽은 대회의실로 각종 문화행사에 활용되며, 옥상은 개방되어 많은 관광객이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곳이다. 충주문화원은 지방 문화 사업 조성법에 의하여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지방 문화 사업자로서 향토 문화의 개발과 보급, 국가, 지방자치 단체의 시책, 홍보, 향토 문화재의 발굴, 보존, 선양, 생활개선을 위한 지도, 사회 교육에 관한 사업, 지역 사회 개발과 사회 복지 증진, 국제 문화 교류 및 이해 증진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고 있다.

  


오시는길
 1. 탄금대

 

탄금대는 충주시 서편 칠금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번국도를 따라 충주시로 들어오다보면 철길을 넘어가는 고가도로 밑으로 충주시가 펼쳐지면서 사거리가 나옵니다.이곳에서 우회전을 하시고 충주역을 거쳐 바로 앞에 첫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시면 칠금동으로 들어서게 됨과 동시에 탄금대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또한 중앙탑공원과 중원고구려비 유적자를 방문하실 수 있으며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