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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조 / 보물 1523호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2. 20. 13:21

불국사 석조 / 보물 1523호

 

 

문화재청은 경주 불국사내에 있는 '석조(石槽·돌수조)'를 최근 보물 제1523호로 지정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석조유물은 경북도가 1979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했으나, 일반인들이 음수대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경북관광개발공사의 한 직원이 지난해, 이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며 문화재계에 알렸고, 이후 문화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근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다시 승격됐다.

석조는 통일신라 때 만든 것으로 길이 262㎝·너비131㎝·높이 52㎝ 크기로,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당시의 특징인 직사각형으로 제작됐다. 또 일반적인 통일신라기 석조와는 다르게 모서리가 둥근 것이 또다른 특징이다.

석조의 안팎에 새겨진 조각과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성과 높은 예술수준을 잘 보여줘 역사·예술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문화재계의 한 인사는 "돌물통에 담긴 토함산 옥로수로 목을 추기는 순간 신라 천년의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불국사 다보탑(국보 20호)

▲ 경내로 들어서며 바라 본 석가탑과 대웅전 모습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 다보탑 모습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21호)

불국사 삼층석탑과 불국사 다보탑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모습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 유물(국보 126호)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탑 내부에 사리봉안을 위한 공간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중심부에 놓여졌던 사리외함과 함께 안에는 알형으로 생긴 은제의 사리 내·외합과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각종 구슬과 함께 있었다. 사리함의 주위에는 청동제비천상과 동경, 목탑,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놓여있었다. 사리함의 바깥 기단부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가 한데 뭉쳐져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사리외함은 4면에 덩굴무늬를 좌우대칭의 모양으로 뚫어 새겼으며,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도 무늬를 뚫어 새겼다. 지붕 위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지붕 꼭대기, 모서리, 지붕 마루에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지붕 끝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아놓았다. 안정된 각부 비례와 정제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사리합 중에서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 석가탑 해체시 발견돤 유물(문화재청 사진)

은제 사리내·외합은 계란모양으로 은으로 도금하였으며 8세기 중엽 양식을 보인 화려한 연꽃무늬와 작은 동그라미를 찍어 만든 어자문(魚子文)으로 장식하였다. 금동 방형사리합은 앞·뒷면에 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보살이 있는 모습과, 옆면에 인왕상을 선각(線刻)하였다. 뚜껑에는 3층 탑 모양의 작은 꼭지가 있으며 합 속에는 향나무로 깎은 작은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 되는 곳에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 보강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은 751년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의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 대웅전

▲ 대웅전에서 바라 본 석등

▲ 대웅전에서 바라 본 석가탑과 다보탑 전경

▲ 백운교 누각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범영루에 있는 법고 모습

▲ 백운교 누각에서 바라 본 좌우 모습

▲ 무설전

▲ 관음전

▲ 나한전

▲ 비로전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

▲ 비로전에 모셔진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모습(문화재청 사진)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 불국사 사리탑 보호각 모습

불국사 사리탑(보물 61호)

▲ 사리탑 모습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 여래좌상 모습

탑신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 보살상

▲ 기단부 모습

▲ 극락전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늘씬한 몸매 등은 장대하고 건강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 문화재청 사진

▲ 범종각

▲ 여기저기 널려 있는 부재들(위 사진 윗쪽에 석조가 보임)

불국사 석조(보물 1523호)

백제시대의 석조는 수조부분 형상이 원형이고 통일신라시대 및 그 이후의 석조는 대부분 직사각형인데 불국사석조의 형상도 기본은 직사각형을 이루며 네모서리와 장변의 중앙부에서는 안쪽으로 둥글게 모접기하여 유려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석조의 규격은 길이 262cm, 폭 131cm, 높이 52cm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좁아져 입면상으로는 사다리꼴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석조에 비해 내·외면에 조식이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불국사 석조 모습(문화재청 사진)

외부 면에는 중앙부와 상부에 가로로 도드라진 띠를 돌리고 중앙부의 돌림띠 아래로는 장변에 각 6개, 단변에 각 3개씩 모두 18개의 8괄호형 안상(길이 32cm, 높이 7cm)을 조각하였으며, 내부 면에는 바닥 중앙부에 타원형의 커다란 자방형상을 조식하고 이를 중심으로 장변의 좌·우 바닥 면과 측면벽으로 연결하여 단청의 머리초 수법의 연화문을 조각하여 매우 특이한 수법으로 화려하게 조식하였다. 이는 석조에 물을 채우면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의 바닥 중앙에는 지름 약 3.5cm의 출수구가 있다.

이와 같이 불국사석조는 일반적인 직사각 형태에 비해 각 모서리를 모접기하여 유려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고, 외부면의 돌림띠와 안상조식 및 내부면의 자방과 연화문 조식수법에 있어서도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여 신라인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예술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보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