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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보물 1506호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1. 1. 10. 14:31

순천 선암사 /보물1506호

백제 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그 때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적고 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후 선암사는 복구를 못하다가 1660년에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의 세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庵), 도선암(道詵庵)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선암사 부도밭

▲ 멀리서 바라 본 선암사 승선교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과 서악(西岳)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 뿐만 아니라 화엄대법회를 1734-35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각각 선암사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눌암(訥庵).익종(益宗) 등이 제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의 4대 명 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의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 선암사 홈페이지 내용 발췌 -

선암사 승선교(보물 400호)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 선암사 승선교 전경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 선암사 승선교 전경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 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승선교를 지나면 바로 2층 누각인 강선루가 나타납니다.

선암사 삼인당(전남 기념물 46호)

▲ 선암사의 연못인 삼인당 전경과 이름모를 석재 조각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 일주문 가기 직전 좌측에 하마비도 보입니다.

선암사 일주문(전남 유형문화재 96호)

선암사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일주문은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맞배지붕집이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 일주문 천장과 경내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는 기둥 양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 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 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앞면 중앙에 ‘조계산 선암사(曺鷄山 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범종루와 범종각

순천 선암사 대웅전(보물 1311호)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 선암사 대웅전 측면과 내부 전경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 선암사 대웅전 좌우 천장 모습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호)

▲ 선암사 대웅전 앞의 좌우로 배치된 2기의 삼층석탑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 남북 방향에서 바라 본 선암사 삼층석탑 모습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조사당

▲ 불조전

선암사 팔상전(전남 유형문화재 60호)

▲ 팔상전(해체 보수 중)과 내부 전경

정유재란(1597)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4년(1698)에 약휴대사가 다시 지은 후, 순조 24년(1824) 해봉대사·눌암대사 등이 다시 지었는데 팔상전도 이때 지은 것이다. 선암사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계이다. 원래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앞면의 공포만 다포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여진다. 내부에는 팔상도 외에 도선·서산·무학·지공·나옹 등 우리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 담장 안에 각황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실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각지에 심어오던 관상용 자원식물이며 이른 봄 피어나는 단아한 꽃과 깊은 꽃향기로 시·서·화 등에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온 식물이다.

▲ 담장 주변에 있는 선암매 모습

선암사의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 20여 그루의 매화 중 고목으로 자란 백매와 홍매 2그루는 아름다운 수형과 양호한 수세를 보이고 있고,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바로 옆의 와룡송과 함께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나무이다.

선암사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