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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미륵리사지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0. 10. 12:13

 중원 미륵리사지

 

미륵리사 또는 중원미륵리사지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로, 사적 제317호다.

면적 80,454㎡.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石窟式) 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절터 안에는 석불입상·5층석탑·3층석탑·석등·귀부(龜趺)·당간지주·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은거하러 가던 중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중원미륵사지는 국가 사적 제 317 호로 지정관리되고 있으나 바로 작은 개울을 경계로하여 세계사가 들어서 있는데

미륵사지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문화재 해설사의 이야기다.

누구나 이 미륵사지는 세계사 절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또한 사적지안에 이렇게 사찰이~~~~~

하긴 미륵사지가 사찰의 속내이니 사찰이 있는것이 당연하다고 볼수 밖에..... 미륵사지를 등지고 북쪽을 향하여...  

 

미륵리 석불입상(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등(유형문화재 제19호), 미륵리 오층석탑 (보물 제95호)이 일직선으로 세워

져 있다는 안내서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미륵리 석불입상(보물제96호)은 고려시대 유행하던 거불의 하나로 화강암 5매를 연결하여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고

머리에 팔각형의 판석을 올려 갓으로 삼고 있었다.

이 불상을 보면 뭔가 어설픈 세련되지 못한듯 하게 보이고 얼굴부분과 신체부분의 조화가 부자연 스럽게만 보이느것

을 현재의 모습으로 얼굴부분은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듯한 느낌을 받을수 있을만큼 깨끗해 보이고 다른 부분들은

세월의 흔적처럼 돌 이끼등이 붙어있어 옛스럽게 보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일반불자들이야 그져 신앙의 대상일뿐, 석불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분들이야

왜 라는 의구심을 불러 연구에 몰두를 하겠지~~~~~~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그져 그렇게 큰 부처상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 아닐까...............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보물제95호인 삼층석탑, 석등은 연화대석에삭의지대모양을 만든위에 팔각의 간주석 위에 상대석

은 다시 연화문양을 넣었고 화사석은 4면에 화창을 뚫었고 8각의 옥개석과 연꽃봉우리 모양의장식이 얹혀저 있었다.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모습이란다.

 

석등의 화창으로 바라본 오층석탑의 윗부분~~~~~~~~~~~~~~~~

 

화창으로 바라본 미륵불두 ~~~  조리개 초점이 잘못 맞아 또렷하지 못하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석등의 일종인가 그렇다면 지대석과 서주의 문양이 흔히 접할수 없는 문양이다.

 

보물 제9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미륵리 오층석탑 단층기단위에 5층 탑신을 세웠으며 노반과 복발 찰주가 보인다.

1층 받침돌은 그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그대로 다듬어 사용하였다는 설명과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고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가 맞지 않다는 안내표지판의 설명을 보았다. 

 

큰 암석위에 얹혀 있는 이상한 이 바위덩어리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일명 거북바위라고도 하며

그 위에 둥근바위(공기돌)는 고구려 평원왕(平原王)때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

하고 있을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 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단다.

 

유형문화제 제269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미륵사지 귀부 길이가 605cm 높이 180cm 로 우리나라 최대크기의 비석

받침 돌이란다.

등에 거북껍데기 모양은 없으나 좌측어깨 부분에 작은거북두마리가 기어올라가는 모습으로 양각되있으며 등에는

비석을 세울수 있도록 비좌를 만들었으나 몸돌인 비석을 발결하지 못하여 실제로 비석이 세워졌는지는 알수 없다고

안내 되있었다.

위로 기어올라가는 모습의 작은 거북 두마리.

이것은 어디에 어떤 용도로 쓰이던 부재인지 알수없지만 제자리 찾기를 염원해 보기도 한다.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삼층석탑,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초기의 작품이라고 하며 2중기단위에

3층의 몸돌을 얹은 매우 안정된 모습을 한 석탑으로 하늘재(계립령)로 오르는 길 옆에 서 있었다.

탑을 세운이유를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땅기운이 없는 허한 곳을 보강하는 비보책으로 세운듯하다는 안내표지판... 

고려시대 지방불상양식을 따른 대형미완성불두로 소개 되있었다. 

중원미륵사지옆에 있는 큰 회랑지

 

 

소개

중원미륵리사지 이미지

사적 제317호 중원미륵리사지

옛기록에 전하는 계림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죽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미륵리사지는 사적 제317호로 1987년 7월 10일 지정되었다. 이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다.

이곳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의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모든 조영계획은 석굴암을 모방하였고 규모가 웅장한 반면에 퇴화과정이 역력한 석굴이라 하겠다. 본 사지는 1977년과 79년 두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그 윤곽이 다소 드러나게 되었다.

중원미륵리사지 이미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미륵대원 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것이 확실히 고증되므로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찰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소실된 듯하며 사찰 이름은 미륵대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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