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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카자흐스탄서 시위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23. 9. 4. 11:06

"홍범도,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카자흐스탄서 시위

 

고려인 3세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사는 박드미트리 씨가 현지 알마티에서 시위 피켓을 들었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해서 고려인과 함께한 홍범도 장군의 삶과 정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고려인들이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카자흐스탄에서까지 피켓을 들게 되었을까 싶다. 

그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항일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사태 물타기 하지 마라 !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
  !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홍범도, 그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대승에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1895년 항일 의병 활동을 시작으로 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가로서의 25년이 넘는 활약상은 아직 덜 알려져 있다. 청산리 전투 이후의 생에 또한 그러하다.

홍범도는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러시아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중 1937년 11월 다른 연해주의 한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는 한국인이 당한 가장큰 강제이주 사건이다.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7만여 명의 연해주에 살던 한인들은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 당해야 했다.  

<2023년 8월 18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단원들이 공연한 "40일간의 기적 홍범도 장군의 기억속으로"의 한 장면> 

비좁은 화물열차 칸칸이  6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한 달여 동안 아이·노인 등 1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비극을 겪었다. 홍범도 역시 지금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한인들과 함께 이 고통과 슬픔의 과정을 겪었다.  미나리 영화의 미나리처럼 한국인은 어디를 가나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스탄국가에 떨어진 한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살아남았고 그 이상으로 삶을 발전시켰다. 지금 전 세계 고려인들이 55만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현재 국내 거주 고려인은 약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동포들이다. 

홍범도 장군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 소련공산당 입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은 당시 소련 연해주에 있다가 강제이주당하여 역시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게 되고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등 당시 공산 국가들로 강제이주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 영향권안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고려인들에 대한 모독이자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고려인들은 수천킬로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서도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또 노력했다. 철저한 한국어 금지 정책 속에서 그들은 언어를 잃어버렸지만 한국에 사는 우리 현대인들이 잊어버린 명절도, 풍습도 유지하면서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매도는 박드미트리 씨가 든 팻말의 글처럼 소련 영향권안에 살아야 했던 50만이 넘는 고려인 동포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라는 소도시로 이주되었다. 고려인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시련을 이겨내고 이주된 지역에서 생존하고 발전을 해왔다.  홍범도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고려극장도 함께 크질오르다로 옮겨왔는데 홍범도는 밤에는 고려극장 수위,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1941년 독소전쟁이 터지자 73살의 고령임에도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며 현역으로 참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했다. 이것이 소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유아적인 발상인가? 그는 고국을 위한 일이라면 70노옹이라고 한 몸 바치려 한 것이다. 

고려인 독립운동가를 설명해주고 있는 고려인 강디아나 학생,최재형 선생과 홍범도 장군의 패널이 보인다 (2022년 10월 1일)

홍장군은 광복을 불과 2년을 채 남기지 않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먼 이국땅 카자흐스탄 거기서도 크질오르다라는 곳에 묻히게 된 홍범도 장군. 그의 유해를 모셔가겠다는 의지는 김영삼 대통령 등 이전에도 계속 있어왔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자신들과 생을 정말로 함께하고 그 땅에 묻힌 홍범도 장군을 선뜻 내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국에서 장군을 더 잘 모시겠다는 그 말만을 믿고 카자흐스탄에서 함께한 그들에게 정신적인 힘이 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내어주어 이 대한민국 땅에 안장된 것이다. 

<황기철 당시 보훈처 장군 페북 속 사진>

지금의 상황은 "이제야 모시러 왔습니다" 라는 문구가 무색하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홍범도 장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