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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보장하고있는 부석사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1. 18. 11:52

 국보를 보장하고있는 부석사

 

종   목   국보   46호
명   칭   부석사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분   류   불화
수   량   6면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후기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보 46] 부석사조사당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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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초입 주변 전경

 ▲ 부석사 매표소 입구 전경  ▲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의 단풍길이 장관입니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 부석사 일주문  ▲ 일주문을 지나면 당간지주와 천왕문이 보입니다.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255호) 

부석사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내로 들어서면...

 ▲ 천왕문  ▲ 경내로 올라서 내려다 본 천왕문 방향 전경

부석사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130호)

▲ 부석사 경내 전경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다.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움을 실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 밑에서 올려다 본 범종각

▲ 부석사 좌측 경내 전경

 

 

 

 

 

 

 

 

 

 

 

 

 

 

 

 ▲ 종각  ▲ 보장각 내부에 국보 1점,보물 1점(고려각판/조사당 벽화) 전시

부석사 범종각

부석사 안양루

▲ 부석사 안양루 전경 ▼

▲ 안양루 밑서 올려다 본 모습

▲ 안양루 기둥과 누각 내부 모습

▲ 안양루 옆에서 내려다 본 부석사 경내 전경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 좌측에서 바라 본 무량수전  ▲ 무량수전 뒷편 전경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부석사의 부석은...

▲ 부석(좌측 바위)와 이름 모를 석불 모습 ▼

▲ 무량수전 좌측편 바위에 새겨진 부석

 ▲ 무량수전 우측 뒷편에 있는 선묘각

 ▲ 무량수전 우측의 부석사 삼층석탑으로 오르는 계단

부석사 경내 전경은...

▲ 부석사 삼층석탑 앞에서 내려다 본 부석사 경내 전경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249호)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조사당/선비화/응진전/자인당은...

▲ 부석사 삼층석탑 뒷편에 있는 조사당(우측 방향)/응진전/자인당(좌측 방향)으로 오르는 길

 ▲ 자인당(좌)과 응진전(우) 전경  ▲ 응진전 우측 뒷편에 있는 단하각 전경

▲ 자인당 우측의 응진전과 내부 전경

▲ 영주 북지리 석조 여래좌상이 안치된 자인당 건물 외부 전경

영주 북지리 석조 여래좌상(보물 220호) 

▲ 3기의 불상 중에 좌우로 있는 2기의 불상이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북지리 석조 여래좌상입니다.

원래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서 양식상 동일한 조각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의 여래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두 팔이 가슴쪽으로 올라가 있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모양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 서쪽 방향의 여래좌상 모습

 ▲ 동쪽 방향의 여래좌상 모습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당시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대좌의 가운데 부분은 8각인데 각 면에는 수호신인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서쪽의 여래상은 동쪽의 여래상보다 좀더 풍만하며 육체의 선들도 부드러운 편이다.

이 불상들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예로서 단아하면서 인간적인 형태, 평행의 옷주름선, 몸의 자세 등에서 당대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양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국보 19호)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 조사당 입구 우측 철창 안에 있는 선비화  ▲ 조사당 내부 중앙 전경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 조사당 내부 좌측 전경(옛 벽화를 재현한 그림)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조사당 내부 우측 전경(옛 벽화를 재현한 그림)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46호)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전시실에서 촬영이 불가하여,
    좌우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부석사 고려 각판(보물 735호) 

◀ 왼쪽 사진과 위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이 판은 부석사에 있는『화엄경』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나무판에 새긴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킨다. 이 판은 모두 합쳐 634판이며 한 줄에 34자씩 글자를 배열한 특이한 형식이다.

13∼14세기경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나무판에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부석사 동편에는...

▲ 지장전 앞에서 내려다 본 부석사 경내 전경

부석사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127호)

 ▲ 지장전  ▲ 원융국사 비각 전경

부석사 한켠에 지어진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로, 고려시대 승려인 원융국사 결응을 기리고 있다. 결응은 12세에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28세에 대덕(大德: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킴)이 되었다. 고려 정종 7년(1041)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문종 7년(1053) 4월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원융’이라 내리었다.

비는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거북받침은 원래의 것이 아니며, 비몸은 깨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을 이어 붙인 것이다. 바닥돌은 옆면에 안상을 옅게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두었다. 거북받침돌은 많이 닳긴 하였으나 조각솜씨가 훌륭하며, 머리가 용 머리화 되었으나 마치 돌사자처럼 보인다. 등에는 선명한 6각무늬가 덮혀 있으며, 무늬마다 ‘王’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응이 문종 7년(1053)에 입적하였으므로 그 즈음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몸의 파손으로 첫머리와 끝부분의 비문내용을 살피기 힘드나,『조선금석총람』에 그 전체가 실려 있어 내용 파악은 가능하다.

▲ 원융국사비 모습

부석사 동부도는...

 ▲ 원융국사비에서 조금 더 산길로 들어가면 우측에 언덕이 보이는데 그 언덕 위에 동부도가 있습니다. 아래서는 안보입니다.

▲ 동부도 전경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서부도는 못 갔습니다.

부석사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