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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30호 용문사의 은행나무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1. 18. 11:17

 

 

 

   

 

 

사나사를 급히 돌아 나와서 10시 30분 경에 팬션에 도착하니 직원들 대부분은 떠나고 마지막 10 여명이 떠나려는 중 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용문사로 갈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몇 사람도 용문사에 들렸다 간다고 하여 함께 용문사로 출발하였습니다.

용문사 입구에 들어서니 몇 년전과는 달리 주변에 위락시설도 갖추어 놓고 주변이 많이 달라 졌더군요.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서 10 여분을 더 올라가면 그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용문사하면 위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노란 은행잎이 무성한 은행나무죠. 크기는 어마어마한데, 아직 푸른 나뭇잎도 나지 않아서 은행나무가 썰렁합니다. 그래서 검색사이트에서 노란 옷을 입은 은행나무 사진을 한 장 가져 왔습니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30호 용문사의 은행나무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67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는...

 ▲ 대웅전   ▲삼성각(대웅전 좌측)

 ▲지장전(대웅전 우측)

용문사(龍門寺)는 913년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했다는 설과 649년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892년 도선(道詵)이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하는 등 조선조인 1447년에 대대적인 중건이 이루어졌다고 하며,그 후 1907년에 왜군의 병화로 전 건물이 소실된 것을 현재의 대웅전 및 부속건물을 복구했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앞에서 용문사를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왼쪽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안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습니다. 관음전 안에 사람이 없어서 사진을 몇 장 찍을 수 있었습니다. 대웅전 왼쪽에는 삼성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습니다. 용문사 입구 오른쪽으로는 최근에 만든 것 같은 석탑과 범종각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부도탑들이 있습니다.

 ▲ 관음전(용문사 입구 왼쪽)  ▲ 대웅전 앞의 석탑  ▲ 용문사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172호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통일신라 선덕여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한 용문사의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보살로, 청동으로 만든 뒤 금칠을 하였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물 531호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 및 비

부도탑 윗 길에 200미터 전방에 용문사정지국사부도및비(龍門寺正智國師浮屠및碑)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으며, 몇 분 정도 올라가면 등산로 오른쪽에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부도가 있습니다. 다른 부도에 비해서 조각된 그림들이 별로 없으며, 보통의 부도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비(碑)는 부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아서 주위를 두리 번 거려 보았으나 보이지 않아서 등산로를 따라서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10 여분을 올라가도 보이질 않아서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비(碑)는 여기서도 상당히 먼 곳에 있다고 하더군요. 자료에는 부도의 반경 100미터 이내에 있다고 했는데,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산 위로 더 올라가 보았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것이 어느 덧 정상 가까이에 왔는데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오늘은 등산하기도 쉽지않은 용문산을 두 번씩이나 정상 가까이까지 올라서 더 이상은 기력이 없어서 찾기를 포기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다시 부도 뒤로 내려와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왼쪽을 보니 축대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습니다.

 ▲ 부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부도 옆의 계단(비로 가는 길)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도와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부도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계단이 있다는 것은 아래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계단을 따라서 조금 내려가 보니 저 아래에 자그마한 비(碑)가 하나 보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 다녔던 비(碑)였습니다. 비(碑)에는 쓰여진 글씨는 음각을 가늘게 하여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바로 앞은 낭떠러지라 앞에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정지국사비의 전경  ▲ 정지국사비

답사를 마치며...

용문사를 내려오니 동료들은 이미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기가 져서 급히 산채비빔밥에 동동주 몇 잔 들이키니 그 힘들었던 생각이 싹 가시더군요.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다른 곳도 한 두 군데 들러 볼 계획이었으나 오늘의 답사는 이것으로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 2004.04.10(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