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대왕태실 [고궁/문화/유적지]을 찾아서
경종의 태실은 경종이 태어난 다음해인 1689년 2월에 현재의 충청북도 중원군 엄정면 괴동리에 세워졌다.
1726년(영조 2)에는 경종대왕태실비가 세워졌다.
이후로 경종의 태실에는 순호군 16인을 배치하였고 3년마다 위안제를 지냈다.
그런데 1831년(순조 31) 11월에 김군첨 등이 작당하여 석물을 흩어놓고 태실을 파헤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청도 관찰사 홍희근의 조사보고를 받자, 예조판서 조인영을 보내 진상조사를 하였다.
김군첨 등은 책임을 태봉지기에게 미루었으나, 결국 주동자 김군첨은 사형을 당하고 관련자 11명이 유배를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듬해에 다시 예조참판 서희순을 보내 태실을 개수하였다.
태실은 1928년 일제에 의해 다시 한번 수난을 당했다.
조선총독부가 태항아리를 꺼내가버리고, 태실비만 남아 주변에 석물이 흩어진 채로 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현재 남아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모시는 곳으로,
이곳은 조선 경종대왕의 태를 모시고 있었다.
대개는 태항아리 안에만 두는 것이 보통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따로 돌방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두게 한다.
이 태실은 8각의 낮은 받침돌 위로 둥근 돌방을 올리고 8각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옆에 태실비를 세워 놓았다.
영조 2년(1726) 왕의 명을 받아 태실 주위에 8각형 돌난간을 두르고 비석을 세웠으며,
순호군 16명을 두고 3년마다 제사를 올렸다.
숙종 14년(1688)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은 후 이 곳에 처음 마련해 두었으며,
일제시대에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옮겼던 것을 1976년에 제자리로 옮겨 복원해 놓았다.
돌방 안에 있던 태항아리는 일제시대 때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이 곳에는 석조물과 태실비만 남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종대왕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제20대 왕이며, 숙종(肅宗)(1659∼1720, 재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희빈(禧嬪) 장씨(張氏)였고 1720년부터 1724년까지 재위(在位)하였다.
대왕의 태실을 이곳에 봉안(奉安)하고 태봉지기를 두었으나 순조(純祖) 31년(1831) 도적들이 파헤친 일이 있고,
또 일제시대(日帝時代)에 태실을 파헤쳐 개인공적비 둘레석으로 사용했던것을
후에 이를 엄정면 사무소내까지 옮겨 면사무소내 느티나무 둘레석으로 사용했으며
이를 1976년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완전 복원하여, 태실과 태실비가 원형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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