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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찾아서/충주엄정의 신흥사 16나한석조상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4. 3. 19. 10:51

 

문화재를찾아서/충주엄정의 신흥사 16나한석조상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신흥사 석조나한상들은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0호 로 지정되었으며 충주시 엄정면 족동2길 197 에 소재해 있으며 각각 높이 56cm정도로 모두4구가 전하고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들이 일반적인 나한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양식이며 상반신부터 하반신까지 이목구비, 삼도, 의문등의 표현이 섬세하게 드러난 나한상으로 불상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충주엄정의 신흥사 16나한석조상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산 3번지 장병산(長屛山)자락에 자리한 법화종 사찰이다. 건물은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갈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려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절집이 산 허리 위에 있어 불사하기가 어려웠을텐데, 저 많은 돌들과 건축자재들을 어떻게 산 허리 위까지 올렸을까?

 

 

이 절집의 창건설화는 이렇다. 1890년 어느 날 인근 마을(엄정면 신만리 독자골)에 거주하는 오영근(吳永根)이 약초를 캐러 장병산에 올랐다가 석간수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축원을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물을 마시면 한가지 소원을 이루고, 또한 마을 사람들 가운데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득남하는 이들이 생기므로 영험있는 영천(靈泉)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자 오영근은 이곳을 기도처로 삼아 초가 2칸을 마련하고 불상을 안치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신흥사의 창건설화이다. 이후 오영근이 죽자 충청남도 예산에서 온 승려 이영월(李泳月)이 경내 관리를 맡아 하던 중인 1905년 어느날 꿈에 신선(혹은 백의철불)이 현몽하였다. 신선은 스님에게"이 절의 창건주인 오참봉이 처음 은신했던 굴바닥을 파 보아라."라는 계시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3일동안 연이어"좋은일이 있을것이니 파 보아라."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도 이상하게 생각하여 석굴 바닥을 파 보니 종(鍾) 한구나 나왔다.

 

 

이에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당시 조선총독부의 감정 결과 금으로 만든 종으로 판명되어 총독부로부터 얼마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이에 그 돈으로 스님은 함석집으로 인법당을 3칸으로 확장하고 요사를 별도로 신축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삼존 좌측에는 16나한상이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나한 사이에 대리석으로 조각된 4체의 고식 나한이 있다. 높이 51㎝로 전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데, 사찰의 창건과 함께 전래된 고려시대 나한상이다. 현재 4구의 나한은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몇 년전 단청으로 그 원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절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본래 파불된 나한 11체와 함께 경내에 방치된 것으로 옛 신흥사 절터인 엄정면 목계리 부흥사 경내에 있던것을 신흥사 창건과 함께 이안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흥사는 고려시대 절터인 부흥사에서 팔각원당형 부도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100여년전 16나한을 봉안하는 나한도량으로 창건되었음을 나한좌상의 봉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삼성각은 1975년에 신축하였다고 한다.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종각 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며, 산 아래를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남향하여 봉안되어 있다.

 

 

종각은 삼성각에서 석조미륵불입상으로 가는 길목에있고 최근에 조성했다.

 

 

승용차는 절집 밑에까지 가는데 오르막길의 경사가 급한편이다. 마을 밑에 주차하고 올라가게되면 중간에 옻샘도있고 봄이면 산나물 뜯기에도 좋은 곳이다. 절집은 작아도 옛부터 엄정면의 득남과 기복의 도량으로서 알려진 도량으로 깊은 계곡 틈새는 나한의 기도처로, 또 용신의 거주처로서 적합한 곳이라하니 찾아 볼 만곳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