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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실록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1. 29. 09:57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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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151호
명           칭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활자본/ 목활자본
수량 / 면적 2,124책(冊)
지정(등록)일 1973.12.31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부산 연제구 월드컵길 81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이 책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료의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도 보장되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고 관계된 관리를 배치하여 펴냈으며,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하였다. 사료가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남아서 전해내려 왔다.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남은 27책만이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돌아왔고(1932년), 추가 확인된 47책은 93년만인 2006.7월 일본으로부터 반환되었다. 오대산사고본 47책은 기존 규장각 소장 오대산사고본과 동일본으로서 국보 제151호에 추가 지정되었다(2007. 2.26)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갔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朝鮮王朝 實錄 -

 
염라대왕이 하루는 조선조 500년의 임금 27명이 저승에
다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모두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대왕은 건배 제의를 한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곧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역은 세종대왕이 맡았습니다.

'제일 단명한 임금은 뉘시오?'
'예, 단종(17세)입니다.'



'그럼, 제일 장수하신 분과 재임기간은?'
'영조(21대) 83세에 승하하셨는데, 51년간 재위하셨습니다.'

'장남이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7명뿐입니다.(문종.단종.연산군.인종 현종.숙종.순종 / 26%)



'자녀를 가장 많이둔 임금은?'
'태종(3대) 부인 12명에서 29명(12남 17녀)의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후손을 못 둔 임금은?'
* 단종(6대) * 인종 12대 * 경종 20대 * 순종(27대) 입니다.



'안방 출입이 제일 잦았던 임금은?'
* 3대 태종 부인 12명 * 9대 성종 부인 12명

'폭정을 한 왕은?'
'단연, 연산군(10대)입니다'

'제일 현정을 베푼 임금은?'
'예, 통역을 맡고 있는 '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염라대왕:
세종은 백성도 잘 보살폈지만, 밤 정치도 잘해 부인 6명에
22명의 자녀를 둬, 생산 공장도 KS 마크라고 들었소이다~!!

'세종대왕 : 네, 황송합니다.,,??'

' 조선조 임금 중에서 가장 됐다 한 임금은?'
'예, 사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 인데 태평성대를
구가 했습니다.'



'조선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은?
' 47세입니다'

'그렇게 단명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생명을 오랫동안 보존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그토록
보존코자 했었는데 생명은 대단히 짧았습니다.



이유인즉,,,,

첫째. 10대 전반부터 수많은 후궁들 속에서 과도하게
성생활을 했고, 정력제에 해당하는 보약을 자주 복용하여
독이 몸에 쌓였고,

둘째. 일 거수 일 투족을 다른 사람이 다 대신해 줘
자신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 운동이 부족 했으며,

셋째. 임금들의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달팠습니다. 기상시간은 오전 5시 전후. 하루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엔 일러야 밤 11시쯤, 결국은 체력이 달렸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