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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관아공원에서 3,1만세운동 기념행사열려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23. 3. 2. 12:52

충주관아공원에서 3,1만세운동 기념행사열려

 

"함께해요 우리동네 3,1만세운동 이야기" 란 주제로

충주시민단체에서 주체주관한 충주읍내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식과 축하행사가 3월1일 오전10시30분 충주관아공원에서 열렸다.

 

이전에는 자유시장 누리공원에서 기념행사를 개최 하였지만

3년만에 열리는 올해에는 독립운동가 류재명선생이 학업을 마친 충주공령보통학교와

교편을 잡은 충주간이농업학교의 자취가있고 제자들과 3,1 운동을 준비한

유서깊은 조선시대 충주관아공원에서 기념행사를 진행 했다.

 

민간단체에서 주체 진행을 하다보니 제대로 홍보가 되지않고 시민들의 의식부족으로

작은행사가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을위해 만세운동을 했던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선열들의 얼을 되새겨보는 기념행사는 그 어느큰행사보다도 뜻 있고 보람된

행사가 됐다.

 

 

 

 

 

 

 

 

 

 

 

 

 

《충주 3・1운동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와 천도교, 개신교 등 종교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 소식이 충주에 전파되자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행에 나섰습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충주 3⋅1운동이 만세운동 횟수 6회, 참가인원 3.250명, 사망자수 12명, 부상자수 36명, 투옥자수 48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확인된 만세운동은

먼저 3월 11일 달천리에서 천도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출동한 헌병에 의해 해산되었고 김흥배, 홍종호 선생이 체포되었습니다.

3월 12일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읍내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3월10일경 간이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에 참석한 교사 류자명과 제자 장천석, 유석보, 오언영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류자명은 일경을 피해 서울로 피신하였고 이어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4월 1일에는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단경옥, 이희갑, 윤주영, 윤무영, 손승억, 김은배, 이강렴, 이강호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습니다.

4월 8일에는 제일감리교회 장양헌, 김종부, 최명희, 오언영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습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독립자금 모금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천도교 충주교회 교구장 현만협과 정용진이 3.1운동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1919년 3월 체포되었습니다. 6월경에는 칠금리 권태은, 최봉기, 박찬병 등이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경북 문경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독립된 나라에 살고 싶고, 내 나라 국민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인데 출동한 헌병경찰이나 군대는 해산명령을 내렸고 이어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을 하였습니다.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주도자들은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문과 매질이 이어졌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뤘습니다. 만세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요한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어떠한 사회활동도 불가능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으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기념식이 열리는 관아공원 일대는 조선시대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아 건물, 민가, 상가, 각종 도시 시설 등이 밀집했던 역사도시 공간이며 충청감영, 충주부관찰부, 충청북도 도청이 자리잡았던 충주역사의 핵심이고 근간을 이루는 역사유적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의해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선조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한말 의병전쟁의 피와 눈물이 어려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주한 일본인들이 읍성과 관아 등 역사도시 공간을 파괴하고 식민지 지배를 위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왜곡 단절 굴절되는 가슴 아픈 역사가 어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