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목계나루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 충주 역사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입석이 그 옛날의 번창했던 그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뿐이다.
목계 충주구간의 남한강은 딱히 빼어나거나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문막에서 섬강을 따라 남한강이 만나는 법천리에서 목계구간도 일품이다.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며 다니는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추색이 완연한 이 가을에 강가에 핀 갈대와 가로수의 단풍을 보며 한가로운 길을 달려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남한강 ⓒ 2007 한국의산천
문막에서 목계나루까지는 차량소통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시원한 남한강을 끼고 달린다
<다시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요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 목계나루 가는 길 여우섬에서 바라 본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 목계나루 碑 ⓒ 2007.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 목계나루터 碑ⓒ 2007. 한국의산천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 ⓒ 2007 한국의산천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글씨는 판화가 이철수님의 쓰셨다. ⓒ 2007 한국의산천
<정선 아리랑>에 관한 글 참고
정선 뗏목의 이동은 정선아리랑을 한강 주변 곳곳에 울려 퍼지게 했다.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해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데 보름 남짓 걸리는 한강은 정선아리랑이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였다.
정선에서 일천 이백 리 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떼꾼들은 적막감을 달래고 무사한 운행을 속으로 빌며 아리랑을 불렀다. 타고난 소리기질을 갖춘 떼꾼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른 소재가 되어 아리랑 가사로 술술 이어져 나왔다. 강가의 주막에 들러서 거나한 술판을 벌이며 불러대던 소리도 정선아리랑이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라는 가사가 생겨날 정도로 이름난 영월읍 거운리의 만지 전산옥이 머물던 주막에서부터 영월 덕포,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는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한 때는 이곳 목계나루에서도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먼발치에 뗏목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객주 여자들은 언제 배웠는지 정선아리랑을 불러대며 유혹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남한강을 수놓았던 떼꾼과 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권은 정선아리랑이 우리나라 수많은 아리랑과 민요에 영향을 준 주인공이요 터전이 되었다.
스스로 넘어 가기에도 벅찰 만큼 느껴지던 고개를 넘기 위해 시름겨워 부르던 정선아리랑은 어느덧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가고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 왜 몰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강변식당 마당에 있는 도그 ⓒ 2007 한국의산천
▲ 전시된 황포돗배 ⓒ 2007. 한국의산천
황금기를 이루었던 그 영화의 세월을 간직한 체 뚝 위에 서있는 황포돗배
전해 오는 이야기
막흐래기
목계에서 선창벼루를 지나가면 소태면 양촌부락이 나오고 다시 강변을따라 내려가면 <막흐래기>라는 마을이 있으며 그 앞의 강물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막희락탄 (莫喜樂灘)>이다.
옛날 내륙의 삼대하항이라면 경기도 양평, 여주 그리고 목계를 지칭 했었다. 그중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종착항으로 목계나루가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옛날 충청북도는 물론 경상북도나 강원도 일부까지도 한양에 가려면 충주지방을 거쳐야 했는데 말이나 당나귀 등을 이용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어렵고 거의가 목계에 와서 배를 타고 갔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내륙과 경인지방과의 교역물품도 이곳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출입하던 배들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였다고 하는데 서울쪽으로 가는 배는 강 가운데를 운행하고 목계쪽으로 오는 배는 강가를 통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많은 배들이 규칙적으로 운행되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문제는 가끔 부딪치는 여울 때문인데 여울을 잘못 운행하다가 큰 사고가 나게 마련이어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막흐래기 앞에 있는 막희라기 여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는데 각 여울마다 끌패라고 해서 배를 끌어 넘겨주고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곳 막흐레기 여울에 있는 끌패들이 제일 많고 벌이도 제일 잘됐다고 한다.
막흐래기란 뜻은 한자로 말막자, 기쁠희자, 즐거운락자를 써서 莫喜樂인데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희희낙낙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여울이 너무도 어려운 장소이니 희희낙낙하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목계항의<도선별장>은 막흐래기 나루의 사고가 안 나도록 하는데 항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 이동코스 지도 ⓒ 2007 한국의산천
문막~ 손곡리 ~ 법천사지 ~ 부론 ~ 거돈사지 ~ 복탄 ~ 소태 ~ 청룡사지 ~ 목계나루 ~ 장호원~ 영동 고속도로 ~ 서울.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점심을 거른채 답사를 했다. 답사중에는 배고픈 것을 몰랐으나 돌아오는길에 시장기를 느꼈다.
아직 몇군데 빠진곳이 있어 다음 휴일 산행과 더불어 답사를 나서야 겠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고 알게 된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보인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정조 때의 문장가)
남한강변의 유명한 3대 폐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청룡사지에서 천년을 넘어선 석조물들을 만나고 그 시대의 추앙받던 국사들을 만나고 깊어가는 가을을 가득 둘러보고 왔습니다.
가을 바람은 스산한 소슬바람이라고 하였지만 차창가로 스치는 가을 바람은 따스한 가을 햇살 가득했습니다. -官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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