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투어
배도 뗏목도 물산도 사람도 모두 전설이 된 남한강 목계나루터
-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2월 5일 오전 9시 40분경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남한강변에 도착했다.
나루터는 이미 3,4십년전에 페쇄 되었고 남한강변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과거 이곳이 '목계나루터'였음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가 댕그러니 서있다.
다행히 공원에는 충주 출신의 시인 신경림이 그 옛날 목계장터를 노래한 시비가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신경림의 시비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 분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허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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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가 나루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주목의 7진도(津渡) 중 하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루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선인(地方船人)들은 17세기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18세기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상품유통의 증대와
맞물리면서 남한강 수운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5대 갯벌장의 하나였던 목계에는
충주 전역을 비롯하여 제천,원주,음성,괴산 그리고 경상도 북부 지역의 상인까지 모여들었던 상업포구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새우젓배, 그 밖의 상고배(장사치)가 올라와 이 포구에서 짐을 풀면 충주와 제천,원주,영월,문경 등지에서
쌀이며 콩, 담배 등 내륙지역의 산물들이 달구지나 소에 실려와 바꿈질을 하던 것이 큰 장이 되자,
관에서도 난장을 허용하여 도가(都家, 도매상)를 통해 물건을 사고팔게 했으며,
곡식바리를 감독하는 말감고(-監考)를 두어 장을 관리하게 하였다.
갯벌장은 하루만 서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배에 실려 온 물건, 달구지에 실려 온 물건이 다 팔려야만 파장되었으니, 장이 닷새씩 열흘씩 끄는 것이 예사였다.
사방에서 장사꾼들의 주머니를 노려 논다니들이 모여들어 흥청대고 남사당패들이 모여들어 놀이판을 벌이기도 했다.
또 장이 계속되는 동안 강가 모래밭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는 일도 많았다.
특히 정월에는 수운의 안녕과 상거래의 번영을 비는 당제가 벌어졌는데,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 줄다리기였으니,
이 줄다리기에는 사방 백리 밖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목계장의 거래 품목으로는 하류로부터 소금, 새우젓, 건어물, 직물, 설탕, 석유 등이 올라오고,
미곡, 콩, 참깨, 담배, 옹기, 임산물 등이 내려갔다. 이러한 물품들은 주로 객주, 여각을 통해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도 많았고 주막과 기생집도 번성하였다.
이렇듯 조선 후기를 거쳐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남한강 수운은 전성기를 보내며 지역의 번영을 이끌어왔다.
이중환은『택리지』충주목조에서 ‘강을 내려오는 생선과 소금배들이 정박하여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므로 주민들이 모두 장사에 종사하여 부유하다’ 라고 했다.
목계는 충주를 중심으로한 충청도 지역은 물론 강원도 원주와 경상도 북부 지역의 상인까지 모여들었던 상업포구였다.
목계에는 7대 여각이 유명하였는데, 그 중 김유관여각은 안채 5간, 객실 17간, 마방(馬房), 창고 40간에 달하는 규모였다.
목계의 창고에는 10,000석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십세기에 들어 서면서 개화의 물결을 타고 남한강변의 주요 길목에는 신작로가 생기고 철도가 지나가게 되었다.
생활필수품과 목재를 실어 나르던 돛단배와 뗏목은 더 이상 경제적인 운송 수단이 아니었고
따라서 서울을 오가는 상선(商船)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목계나루터에는 버스와 트럭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찻배가 있었고 인도선도 50~60명을 태울 수 있는 큰 배와
20~30명을 태울 수 있는 배가 있었다. 이 나룻배(도선: 渡船)의 규모는 당시 목계나루의 통행량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팔당댐과 목계교가 완공되자 나룻배와 뗏목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1972년의 대홍수로 마을의 대부분이 침수되어 아랫마을과 건넛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새마을이나 외지로
이주하는 바람에 목계마을의 모습은 급변하게 되었다.
목계교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1973년 목계교(위)의 건설이다.
19번 국도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와 엄정면 목계리 사이를 연결함으로서
목계나루는 그 기능을 다하고 폐쇄되었다.
또한 38번국도를 연결하는 목계대교 마저 건설됨으로서 육상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목계대교
한때 이 물길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배와 뗏목들은 흘러간 강물처럼 사라지고
장터의 점포와 여각, 집들도 흔적 조차 남지 않았지만 유장한 한강은 오늘도 그저 흐를 뿐이다.
누가 어찌하여 그리 된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가 그리 만든 까닭이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이를 다시 되돌릴수눈 없는일
<출처:디지털 충주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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