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젖줄 한강을 찾아/목계나루와 장미산 이야기
목계나루
목계나루터. 1973년 콘크리트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터는 없어졌다. |
중앙탑과 중원 고구려비를 지난 남한강 물은 이제 장미산성을 휘돌아 조정지 댐을 향합니다. 이 조정지 댐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신경림 시인의 시‘목계장터’의 소재가 됐던 목계나루에 이릅니다. 그리고 목계나루 건너편에는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거둔 곡식과 베를 보관하던 가흥창이 있었습니다.
●황포돛배 수십척이 닻 내렸던 곳
그 옛날 목계나루는 가뭄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강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습니다. 이 목계나루 강 건너에는 조선 시대에 나라 살림의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등을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곡식 200 섬(400 가마니)을 실을 수 있는 배 20 척이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곡식과 베를 세금으로 거둬들이기도 할 정도로 활기가 넘쳤습니다.
또 가흥창에는 경상도의 안동ㆍ상주ㆍ문경ㆍ예천ㆍ봉화ㆍ풍기ㆍ순흥ㆍ영천 고을과 충청도의 영춘ㆍ단양ㆍ제천ㆍ청풍ㆍ충주ㆍ괴산ㆍ음성ㆍ보은 고을 등의 조세를 모아 쌓아 두었습니다. 당시 서울과 가흥을 오가는 배가 한 해에 무려 800 척이 넘었고 배에서 짐을 내리는 일꾼만도 500여 명이 이르렀지요.
이 가흥창 나루터 앞 남한강 기슭에는, 한양까지 260 리 물길을 무사히 가도록 해달라고 용왕에게 제사지내던 제단인 ‘비원불’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한편, 목계나루는 1930년 서울과 충주 사이에 놓은 충북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천에서 소금ㆍ젓갈ㆍ건어물 등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온 황포돛배 수십 척이 닻을 내렸지요.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골동품 가게와 남한강에서 건져 올린 수석을 보여주는 가게 몇 곳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목계장의 정성기시절
1930년대 목계장의 활기찬 모습. 하지만 근대화 바람으로 지금은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
●목계나루와 목계장에 얼힌 야화
목계나루가 예전에는 '남한강의 3대 나루' 중 하나였다 합니다. 세곡을 걷워 보관하였던 '가흥창'이 있었고, 목계장이 있어 옛날에는 뗏목으로 물건을 실어와 장에 내다 팔면 돈을 몽땅 벌었다 해서 "떼돈"이라는 말이 생겼다 합니다.
또한 떼돈을 벌어 기생집에서 며칠 쓰고 나면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합니다. 목계장터 기생 중에 "흥청"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 인물이 어찌나 아리따웠던지 '흥청'에게 이끌려 돈을 물쓰듯 하다보면 쫄딱 다 빼앗겨 결국 망하게 된다 해서 생겨난 말이 "흥청망청"이라 합니다.
장미산성
장미산성. 2940 m 길이의 산성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산성의 성격을 지닌다. |
●남매의 슬픈 전설 간직한 장미산ㆍ보련산
장미산성은 푸른 남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미산 정상 근처에 있습니다.
장미산성이 처음 지어진 때는 백제 시대였으며, 나중에 고구려가 남방 정책을 펼치며 포곡형의 성을 다시 쌓게 되면서 고구려의 산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미산성은 백제와 고구려 산성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 장미산성 남쪽에는 중원 고구려비, 서쪽에는 봉황리 마애불상이 있습니다. 또 주변에는 여러 절터가 발굴 됐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살펴볼 때 장미산성은 삼국 시대에 내륙 지방의 남북을 잇는 중요 장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역사 학자들은 고구려 장수왕 63 년에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지은 ‘국원성’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장미산성 서북쪽에는 보련산성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산성에는 ‘장미’와 ‘보련’남매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옛날, 한 집안에서 장미라는 남자와 보련이라는 여자가 장수감으로 태어났습니다. 예로부터 한 집안에서 장수가 둘 나오면 한 사람은 집을 떠나거나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누가 더 힘이 센 장수인지 가려 내기 위해 산성 쌓기를 시작했지요.
하지만 남매의 성 쌓기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더욱이 아들 장미의 산성 쌓기가 더 느렸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떡을 해 보련에게 갔습니다. 이에 보련은 떡을 먹느라 성 쌓는 일을 잠시 쉬게 됐지요. 그 틈을 타 장미가 먼저 성을 완성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보련은 곧바로 집을 떠났는데, 다음날 저녁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보련이가 성을 쌓던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던 산을 장미산이라 이름 짓고 그 성을 각각 보련산성ㆍ장미산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김남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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