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코너♣/김광영의 삶

마음속에 평화가 있다/1.배드민턴과 나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1. 5. 3. 18:41

 

 

 

 

 

마음속에 평화가 있다

중원경/김광영

 

내나이 어언 70 . 지난날들을 거슬러볼때 어린시절이 엇그적게 같은데 1달만 있으면 "고희" 멀써 70 이란다. 옛 어른들을 비교해 보면 많이 산 것인데 70이란 세월동안 내가 한 일들은 과연 무엇인가?

그 긴세월동안 너무 한일들이 없다. 철들자 망녕이란 말같이 지금생각하면 할일도 많고 해야할일들도 많은데 앞으로 얼마나 내일을 할수 있으런지 알순없으나 내 기력이 허락하는한 하고있는일들을 계속하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평화요 행복 이기때문이다.

 

1. 배드민턴과 나

 

재기의메달획득

 

2011년 4월29일 진천에서 충청북도 어른신생활체육대회가 있었다. 개회식장에서 이시종도지사를 만났다. 지나친 만남이었지만 인사를 나눴다. 이지사는 "오셨네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해 주었다. 개회식이 끝난뒤 각기 경기장으로 이동해 경기에 임했다.

 

어르신대회는 배드민턴의경우 2인복식조로 시합을 하는데 두사람의 나이를 합하여 120세.130세. 140세  띰으로 나누워 경기를 하는 것인데 15점 3세트로 결정하게된다. 나는 83세어르신과 함께 조가되어 140세 경기에 임했다. 허나 결승진출에서 14 : 15 로 1점차이로 석패하여 결승에 진출하지못하고 "동메달" 3위를했다. 상품은 메달과 부상으로 생거진천쌀 4kg 선물세트인데 1위~3위 까지의부상이 똑같아다.

 

작년에괴산에선 금메달을 땃는데 이번대회선 1점차로 결승에질출지못하고 동메달을 따서 좀 아쉬웠으나 메달에 관계없이 이렇듯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는것에 감사를 드린다.

 

지난일이지만 2010년 1월8일 서울 이대병원에서 어깨회전근개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전 담당의사는 앞으론 배드민턴을 할수 없다했다. 배드민턴은 나의건강을 지켜준 매우 귀중한 운동이며 삶의 동반지었다. 하여 수술한다는 자체보다 배드민턴을 못한다는데 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배드민턴이 나의건강을 지켜준 덕분인지 수술결과는 매우 양호했고 운동을 할수없다했던 배드민턴을 다시 시작했으며 1년후 2010년 괴산에서 실시된 충북어르신체육대회에서 충주시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배드민턴에서 100여개가 넘는 메달을 땃지만 이번메달은  운동을할수 없다는 진단을을 받은후 얻은 수학이어서 그 어느때 보다도 기뻣고 가치가 있는 메달 이었다. 

 

 

몸이세약했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나는 일본오사카에서 출생했으며 해방 전해에 우리나라로 왔다. 이유는 나의 아버님께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던 젊은시절 일본인들과의 민족적 패싸움이있었는데 이에 연류되어 직장을 잃게 되었고 그후 먼저일본에가서 자리를잡고있었던 친구의 구직으로 일본으로 가셨으며 무역선을 타셨는데 그후 온랜세월이 지난뒤 어머님이 일본으로 가시어 내가태어났다. 그래서 나의출생지는 일본으로되어있다.

 

내가 한국으로 온것은 내나이 3살때이며 그후 아우를 보았는데 나와는 4살 차이이다. 우리는 아들만 3형제인데 이중 나는 어릴적부터 약골이어서 청년이 될때까지 세약한 모습을 보이며 자랐다. 이런나의 형편을 알기에 군에입대할때 건강진단에선 가슴을 넓히려고 가슴넓이를잴때 가슴에 힘을주었던 생각이 난다.  이런결과로 1을종이라는 판결을 받아 군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나는군입대전 신경성 위장병이 있었었는데 군엘가서 어려운고비는 격었으나 고정식사에 규칙된생활에서인지 위장병이 없어졌었다. 군에 입대할땐 아버님께선 6.25사변14후퇴적 돌아가셨고 어머님홀로 형님은 군엘가셨고 동생과 나를 데리고 어려운생활을 하시며 고생을 하셨는데 내가 군대에서 복부를 끝내고 제대를 5개월 남겼으때 돌아가셨으니 당시집엔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홀로 생활을하게됐었다.

 

내가 제대후 동생과 함께 고향엄정에서 충주로왔고 동생은 공군에 입대를 했으며 나는 충인동 자유시장에서 아주작은 "금광상사" 상호명의 생필품 가계를 열게된다. 자본금없이 어렵게시작한 일이어서었으나 그때의 생활은 억망 이었다. 당시 형님댁에서 거주하며 장사를 했는데 점심값을 줄이기위해 가계에서 파는 국수를 물을끌이고 만들어 가계에서파는 간장을 부어 간을마춘후 점심을 때우곤 했었다.

 

당시 나는 국수를 매우 잘 먹었었는데 그때에 물려서인지 현재도 국수는 내돈을내고 사먹지않을정도로 별로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이쁜만 아니라 장사를 하는이들의 공통점이기도하나 식사때가 정해저있질 않고 시간관게없이 아무때나 끼를 때우는 습관이되고보니 위장병이 도젔다. 병원에서 신경성위장병이라 했다.

 

이병은 한끼라도 약을먹지않고는 생활을 할수 없었고 약도 듣는약이 따로 있어 이약을 이웃인 건강약국에서 1박스씨 주문을해놓고 상복해 왔었다. 어러던중나는 중병이 아닌가하여 충의동제중의원 이낙진원장님께 건강진료를 받았는데 결과는 병보다는 생활습성을 바꾸라는 조언을 받았으며 이때에 바로 지금내가 생활체육으로 하고있는 배드민턴이며 이때 내나이 40이었다.

 

 

내 건강을 지켜준 배드민턴

 

당시 나는 장사일로 하루종일 바쁜일정을 보내고 있는터라 의사께서 운동을 권했을때 제가하루종일 움직이는 일이 얼마인데 운동부족이냐? 고 반문하기도 했었다. 그때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명언 이었다. 일은 먹고살기위해 좋던 싫던 무조건 하는생활이고 운동은 내 건강을 위해 규칙적으로 실시하는 생활 습성 이라고 하신말씀이...

 

하여튼 이때 나는 배드민턴과 인연을 맺어 현재 30년간 운동을 해왔는데 배드민턴을 한뒤 매일달고있었던 약들을 모두 끈게되었고 내과질환으로 병원을 찾는일이 거의 없었던 지난날을 생각해 볼때 배드민턴은 내 건강을 지켜준 은인이며 내건강의 전부었다.

 

이러한 배드민턴이니 어깨회전근개파열로 수술을 받을때 운동을 못할수있다는 진단에 나의 일부분이 떨어저 나가는 기븐이었었다. 그러나 배드민턴은 나를 놓지 않았다. 그동안의 함께한 인연으로 내몸을 강하시킨 탓인지 배드민턴과 연을 끈어야 한다던 것을 수술후 성과가 좋았고 지금 다시 운동을 하였기에 역시 배드민턴은 내삶의 전부라해도 과언은 아닐상 싶다.

 

 

배드민턴 으로 잃은것

 

이럿듯 내건강을 지켜주었고 나를 재생시켜준 배드민턴을 생활화 하면서 모든것을 얻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잃은것들도 있었으니

 

첫번째가 19ㅇㅇ년 ㅇㅇ월 ㅇㅇ일 배드민턴 운동을 하기위해 여중체육관 으로 가던중 (반구보) 인도부록이 튀나온것을 피하지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종지뼈에 금이가는 사고가 발생하여 깨어진종지뼈를 붙이는 수술을 하였고 이로인해 약1년이상 운동을하지 못하는 변을 초래 하여 현재도 왼쪽무릅에 수술자국이 두군데 남아 있다.

 

두번째가 또한 어깨회전근개파열 이라는 어깨를 움직이는데 역활을하여주는 힘줄이 끈어저 끈어진힘줄을 잇는 수술을 받은 것이다. 이사고의 결정적 순간은 2009년 8월 1일 집안거실에서 미끄러져 팔을 순간 바닥을 집는바람에 발생하긴하였으나 진찰결과 배드민턴을하는 과정에서 연결부분의 힘줄이 약해저 발생한 결과라고 했다. 수술은 이대목동병원에서 하였는데 당시 담당의사는 앞으로 배드민턴을 못한다는 진단을 내리므로 순간 담담 하기도 했다.

 

사고는 2009년8월1일 이었으나 원인을 찾지못해 침술과 물리치료 기타 여러곳들을 거처 치료를 하였으나 효력이 없어 정확한진단이 나오기까지는 4개원 이상이 걸렸다. 수술은 2010년 1월 8일 하였으며 시술후 숙련기관을 거처 6개월후 결과가 좋아 나는 못할수도 있었다는 배드민턴을 다시시작할수 있었고 동년10월29일 괴산에서 실시된 충북어르신체육대회에서 충주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 하는 성과를 거듬으로서 가장 가치있고 기븐좋은 메달 이었다.

 

세번째는  비복근파열이라고 종아리근육을 연결해주는 힘줄(인대)가 끈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0년 겨울 추운날씨에 운동을한 닷인지 운동도중 오른쪽종아리근육이 끈어지는듯한 아픔과 동시 걸을수가 없는 통증이 발생했다. 이런 것이 2회에 발생함으로 전문의사의 진단을 받아보니 비복근파열이라 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지나고 통증이가시면 그냥운동을해도 쾐찬다는 조언을 받았고 지금 이렇듯 운동을 하고있다.

 

네번째는 발꼬락뼈의 이상으로 양쪽의 엄지발꼬락의 통중이 지속되는 일이발생하여 운동하는데 큰 지장을 받고 있었는데 계속 운동을 지속해서인진 알수없으나 잘 낳질않아 고생좀 하였었다. 그런데 어깨회전근개파열 치료과정과 비복근파열의 치료과정으로 약 1년 이상 운동을 못하고 쉬어서인지 현재는 발꼬락통증이 완전이 치료가된 것이다.    

 

 

배드민턴으로 잃은것과 얻은것

 

내 70평생을 뒤돌아볼때 참으로 재미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약골로 태어나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병약하여 어렵게 살았고 30후반 배드민턴을 시작하여 체력을 길렀으며 배드민턴에 빠져들어 도민체전의 충주대표로 출전하는등 각종경기에참여해 100여개가넘는 메달을 땃고 봉사활동으론 클럽총무2회. 회장1회. 충북생활체육연합회 부회장1회 를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배드민턴의산실 충주클럽" (내용: 충주배드민턴의역사.연혁.역대임원명단 등) 이 실려있다.

또한 나의 임원역임 당시 충주클럽은 충청북도도민체전선수로 충주시와 중원군에 선수를 선발 출전시켜 우승을 잇끄는 전패기록을 남겼으나 훈련비는 전무했고 이에반해 우승기록이없는 축구는 훈련비가 많이 지출됨을알고 이를 건의하여 양시.군에서 훈련비로 수백만원을 받아 이를쓰지않고 협회기금으로 충당하였고 배드민턴에서 가장 비용이많이드는것이 삿틀인데 구입비를 줄이기위해 공장과 직거래를 조성하여 년간 많은 비용을 절약하였다.  

 

이렇듯 나는 배드민턴에 푹 빠젔고 정과 열을 다했다. 배드민턴은 신체뿐만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것을 얻어 활발한 역활을 했던 것 이다. 현재도 매년 도민체전에 충주시협회에서 선수를 출전시키고 있으나 모든훈련비를 선수운영비에 소비하고 있는 것과는 당시 임원과 선발 선수들이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알수 있다.

 

이렇듯 나는 배드민턴으로 하여금 강인한체력과 정신력을 얻었고

잃은것은 무릅종지뼈 수술. 어깨회전근개파열 수술. 비복근파열. 등이 있다.

 

배드민턴은 내게있어 얻은것과 잃은것이 있지만 지금현재로선 적게잃고 많은것을 얻은 내인생의 동반자 라고 할수 있다.  내인생을 도리켜 볼때 오뚜기갖은 인생 이라고나할까 어찌됐건 현재 나는 나와 연배의 친구들과 비교해볼때 건강에 자신을 갖고있으며 활발히 운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나의 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배드민턴으로걷은 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