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한국문화

이순신 선무공신교서/보물 1564호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1. 5. 13. 12:42

이순신 선무공신교서/보물 1564호                                                                            written by 한국의 국보

 

 

 

▲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忠武門)

나홀로 제29차 능원묘 정기답사 자료로 현충사에서 9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 충무공 이순신장군 묘(바로가기) 자료만 만들었다가 2년여 만에 시간이 있어서 현충사 경내에 위치한 충무공의 3자인 이면공의 묘를 포함해서 현충사의 자료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현충사 안내도

아산 이충무공 유허(사적 155호)

▲ 현충사 입구 전경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945~1598)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 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현충사 경내 연못 모습과 주변 전경

주요 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본전을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유물관에는 국보76호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비지정 유물 26점 (영정, 교지, 사액현판, 무기류 등)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면공 묘소(이충무공의 3자)

▲ 현충사 경내 우측 안쪽에 위치한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공 묘역 입구 전경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했던 셋째 아들 이면(李葂)은 1577년 아산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므로 충무공이 그지없이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명량해전 이후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 때 왜적들이 마을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하자 나아가 외적을 무찌르다 약관 21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 높은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이면 묘역이 보입니다.

충무공께서는 이면공의 전사 통지를 받고 애통하여 정유년 10월 1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사가 혼란해진다. 겨우 겉봉을 뜯고 열(충무공의 차남) 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글자가 적혀있어 면이 전사 한줄을 알고 소리놓아 통곡하였다."

▲ 묘역에는 석물은 한 점도 없이 상석과 묘비만 조성되어 있으며, 상석과 묘비도 근래에 조성한 듯 합니다.

"내가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이상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후에 1796년(정조 20년) 조정에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증직하였으며, 묘소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3일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이면공 묘역 좌측 능선으로는 후손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활터 북편에 보이는 묘는 위로부터 3대 종손 이광윤(李光胤), 4대 종손 이홍의(李弘毅), 10대 종손 이규남(李奎南) 부부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 충무공이 활을 쏘던 활터(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 충무공 고택 전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변씨(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가 되던 해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선전관,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공은 5월초 1차 출동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하여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때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연이은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 충무공 고택과 전방 좌측면에 위치한 충무정(忠武井)

이후 1593년 웅천 등의 적 수군을 궤멸하여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에서 왜적을 소탕한 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보호, 산업장려에 힘썼다.

1597년 왜(倭)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받게 되었으나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 휘하에 백의종군하였다가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랑해전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598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陣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었다.

공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된 애국심과 충성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지극한 효성심을 고루 갖춘 인격자이었으며 특히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중 싸움마다 승리했고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하여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경매 신세 '현충사 이순신 고택'… 문화재 관리 허점

뉴시스 | 김성환 | 입력 2009.03.25 16:54

【천안=뉴시스】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살던 고택과 무예 등을 연마하던 10만㎡ 규모의 개인소유 토지가 법원 경매로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현충사 경내 이 충무공 고택 등 3필지를 비롯해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와 농지 4필지 등 전체 7건 9만8000㎡의 용지가 30일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1차 경매가 열릴 예정이다.

경매가 실시되는 토지 중 사적 155호인 아산시 현충사의 경내에는 이 충무공 고택부지(3901㎡)를 비롯해 소나무 3869그루와 충무공 장인, 장모 등의 묘소가 포함된 임야 등 3필지 7만4711㎡가 포함됐다.

이 토지는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인 A씨의 사유지로서 경매 청구권자는 B씨(70)씨로 알려졌으며 청구금액은 7억원이다. 종부 A씨는 8년 전 남편이 사망한 뒤 종갓집 재산을 담보로 얻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채무자에 의해 관련 부지가 경매에 부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가 어떻든 이번 경매 사태는 정부가 해당 토지를 국유화하지 않은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경매가 진행되는 곳은 이 충무공이 살던 옛 집의 터와 고택과 충무공 아들 묘 등이 있어 보존가치가 높지만 국유화되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1967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통해 현충사 경내 57만㎡ 가운데 7만7000㎡의 사유지를 보존 관리만 하고 있던 것이다.

문화재청 현충사 관계자는 "당시 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국가와 후손들이 사유재산 문제를 떠나 현충사를 조성했기 때문에 국유화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문화재청은 법적으로 채무 관계가 있는 물건에 대해 응찰할 수는 없고 매입 예산도 없는 실정"이라며 "장기적으로 이같은 사태 방지를 위해 예산을 확보해 문화재청이 매입하는 방안을 계획중인 것으로 알고있다"고 밝혔다.

이번 경매 사태는 보존가치가 높은 사유지를 사들이지 않고 오랜 세월 방치한 정부의 허술한 사적지 관리와 후손들의 세심하지 못한 재산관리로 역사의 남을 커다란 오점으로 남게 돼 대책마련이 절실하다. 이종익기자
007news@newsis.com

현충사(본전)

이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顯忠祠)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현충사는 1704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사당 건립을 상소한 바, 1706년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여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충무 교육원이다. 1707년 4월 숙종 임금께서 현충사란 액자를 하사 하였으며 1727년에는 조카인 강민공 이을 1732년에는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홍살문

▲ 사당 입구에서 바라 본 충의문

1868년(고종 5년)에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을 겸하고 있던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분노한 유림들이 1906년 2월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일제 치하에서 충무공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이 소식에 접한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 유족보존회를 조직하고 충무공 선양을 통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민족 성금을 모아 1932년 6월5일 현충사를 중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 현충사의 내삼문인 충의문

▲ 충의문 안에서 바라 본 사당(현충사) 원경

1962년 4월28일 제 417회 탄신 기념제전에 최초로 국가 원수가 참석하였으며 1966년 4월 17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에 따라 1967년 5월 24일 본래의 사당(구본전) 위편에 총 건평 63.1평의 순한국식 사당을 준공하였고 구본전은 배전으로 사용하다가 유물관 옆으로 이전 하였다. 이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 사당(현충사) 외부 모습과 내부에 안치된 이충무공 영정

현충사(구 본전)

유물관 좌측에 위치한 구 본전인 현충사(顯忠祠)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최초의 현충사 사당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종손(13대 종손 李種玉)의 가산이 쇠진되어 채무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일은행·호서은행의 경매에 따라 충무공 묘소 임야와 위토(位土)마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지경에 이르러 이 소식이 1931년 5월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뜻 있는 인사들이 이충무공 유적보존회를 조직했다.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화백이 그린 영정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하였으며 아울러 현충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67년 성역화사업으로 새로이 본전이 신축되자 한동안 배전(拜殿)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9월에 유물관 옆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유물관

▲ 유물관 좌측에 현충사 본전이 보입니다.

▲ 유물관 전경

현충사 유물관은 1962년 4월 27일 충청남도에서 한식 목조로 현재 충의문 안쪽 좌측에 건립하고 충무공의 난중일기 등 유물을 최초로 일반 참배객들에게 공개하였다.

▲ 유물관 내부 전시된 이순신장군 유품

1967년 12월 31일 난중일기 등이 도난 당하자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에서 현재의 위치에 지하 20평, 지상 20평의 한식 콘크리트 맛배집 유물관을 확장 신축하였다.

▲ 유물관 내부 전경

▲ 증시교지(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 시호를 내린 증서)

그러나 1968년 9월 9일에 성역화사업 재조정으로 이 유물관이 습기 처리가 되지 못하여 철거하였으며 이후 철근 콘트리트 석조전 슬라브 건물을 현대건설에서 신축 기부 하였는데 1974년 4월에는 전통조경에 알맞도록 한식 청기와 건물로 개조하고 외부 단청을 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사부유서(임금이 군사책임자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명령서)

▲ 무과급제교지(이순신 장군의 과거듭제 무과급제 합경증)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 76호)

▲ 난중일기

이 책은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이순신(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이다. 일기의 구성을 보면 제1권은『임진일기』로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선조 26년(1593) 3월까지 27매, 제2권은『계사일기』로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제3권은『갑오일기』로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52매.

 

제4권은『병신일기』로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제5권은『정유일기』로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제6권은『정유일기속』으로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선조 31년(1598) 1월 4일까지 20매이나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다. 제7권은『무술일기』로 선조 31년(1592)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로 구성되어 있다.

▲ 함경도일기/임진장초/서간첩

7년의 난 동안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이충무공 유물(보물 326호)

▲ 도배/요대/옥로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물들이다. 그의 유품에는 그가 전쟁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길이 197.5㎝의 장검 2점과 갓 머리에 장식으로 달았던 것으로 보이는 옥로 1점, 관복을 입을 때 두르던 각대와 모습이 같은 허리띠(요대 - 무술년[선조 31년, 1598] 10월 4일에 명나라 장수 유격장 왕위엔저우[王元周]가 장군께 선물한 것이다) 1점, 복숭아 모양을 한 술잔(도배 및 구대는 장군께서 친히 쓰시던 유물이다) 1쌍이 있다. 이 유품들은 임진왜란 중에 그가 사용하던 것으로, 그의 숭고한 정신이 서려있는 유물이다.

▲ 장검

이순신 선무공신교서(보물 1564호)

▲ 이순신 선무공신교서

임진왜란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이다. 충무공 사후 6년 후인 1604년(선조 37, 만력 32)에 내린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18명에게 내린 공신칭호로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등 3인이고, 2등은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등 5인, 3등은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등 10명이다.

이 교서는 77행에 걸쳐 이순신이 세운 공적에 대한 찬양과 공신으로 책훈함에 따른 상으로 본인과 부모, 처자를 3계급 승진시키고, 노비 13구와 토지 150결, 은자 10량, 표리 1단,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교서의 이면에는 본 교서를 필서한 사자관인 이경량의 성명이 작은 글자로 필서 되어 있다. 이 선무공신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활동한 공적과 그에 따른 포상 내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임난사연구 자료로서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서예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현충사 정려

▲ 전방 우측면에서 바라 본 현충사 정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건물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사표(師表)로 삼아 그 정신을 고취하고 본받도록 세우는 것이다.

▲ 현충사 경내 중앙 주변 모습

▲ 현충사 정려

현충사 정려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한 이충무공과 공의 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하였다.

▲ 이순신장군 충신 정려(정려 위치는 정려각 좌측부터)

강민공 이완은 충무공의 조카로서 임진란 때에 충무공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진란이 끝난 다음 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충청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게 되자 몸을 불 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 이완(충무공 조카) 충신 정려

▲ 이홍무(충무공 4대손) 충신 정려

충숙공 이홍무는 충무공의 4대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조카인 충청병사 봉상과 함께 싸우다 옥주에 같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이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 이봉상(충무공 5대손) 충신 정려

▲ 이제빈(충무공 8대손) 효자 정려

충민공 이봉상은 충무공의 5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이인좌의 난 때 난군의 급습을 받아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이제빈은 충무공의 8대손으로 어머니 임종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966년 현충사 전경

아산 현충사 위치도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산57                                                        화살표 상단에 이면공 묘역이 있습니다.

 지도 좌측 중앙의 A 표시 위치에 아산 현충사가 있습니다. 온양온천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한국관광♣ > 한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민속촌  (0) 2011.05.23
순천 선암사 순치14년 명 동종/ 보물 1561호   (0) 2011.05.13
문경 고모산성  (0) 2011.04.25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   (0) 2011.04.22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0) 201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