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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순치14년 명 동종/ 보물 1561호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1. 5. 13. 12:54

순천 선암사 순치14년 명 동종/ 보물 1561호                                                       

 

 

선암사는 신라시대 아도화상의 ‘비로암’ 창건설과, 도선국사 창건설을 가진 사찰로서,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되면서 천태종 전파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경내에는 대각국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보물 제1117호 ‘선암사대각암부도’ 등 보물 14점을 비롯하여 다수의 중요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백제 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그 때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소 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적고 있다. 조선전기의 선암사의 기록은 중종 35년(1540)년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후 선암사는 복구를 못하다가 1660년에 경준(敬俊), 경잠(敬岑), 문정(文正)의 세 대사에 의하여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괄목할 중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쟁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는데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신 분은 호암약휴(護巖若休)스님이었다. 호암스님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이후 법당 8,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부속암자로 선적암(善積庵), 도선암(道詵庵) 등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선암사 부도밭

▲ 멀리서 바라 본 선암사 승선교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상월새봉(霜月璽封)과 서악(西岳)이 다음해인 1760년에 재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는 아도화상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 뿐만 아니라 화엄대법회를 1734-35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각각 선암사에서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 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1789)년에 정조가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이 대각암에서 100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순조는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 하였다.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눌암(訥庵).익종(益宗) 등이 제 6중창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의 4대 명 강백을 배출하였다.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여수,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의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 선암사 홈페이지 내용 발췌 -

선암사 승선교(보물 400호)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 선암사 승선교 전경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 선암사 승선교 전경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벌교홍교(보물 제304호)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 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승선교를 지나면 바로 2층 누각인 강선루가 나타납니다.

선암사 삼인당(전남 기념물 46호)

▲ 선암사의 연못인 삼인당 전경과 이름모를 석재 조각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 일주문 가기 직전 좌측에 하마비도 보입니다.

선암사 일주문(전남 유형문화재 96호)

 

선암사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일주문은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맞배지붕집이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 일주문 천장과 경내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는 기둥 양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 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 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앞면 중앙에 ‘조계산 선암사(曺鷄山 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범종루와 범종각

순천 선암사 대웅전(보물 1311호)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 선암사 대웅전 측면과 내부 전경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 선암사 대웅전 좌우 천장 모습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호)

▲ 선암사 대웅전 앞의 좌우로 배치된 2기의 삼층석탑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 남북 방향에서 바라 본 선암사 삼층석탑 모습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조사당

▲ 불조전

선암사 팔상전(전남 유형문화재 60호)

▲ 팔상전(해체 보수 중)과 내부 전경

 

 

정유재란(1597)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4년(1698)에 약휴대사가 다시 지은 후, 순조 24년(1824) 해봉대사·눌암대사 등이 다시 지었는데 팔상전도 이때 지은 것이다. 선암사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계이다. 원래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앞면의 공포만 다포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여진다. 내부에는 팔상도 외에 도선·서산·무학·지공·나옹 등 우리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 담장 안에 각황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실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각지에 심어오던 관상용 자원식물이며 이른 봄 피어나는 단아한 꽃과 깊은 꽃향기로 시·서·화 등에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온 식물이다.

▲ 담장 주변에 있는 선암매 모습

 

 

선암사의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 20여 그루의 매화 중 고목으로 자란 백매와 홍매 2그루는 아름다운 수형과 양호한 수세를 보이고 있고,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바로 옆의 와룡송과 함께 매화 관련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나무이다.

선암사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92호)

 

 

선암사 무우전 뒷편인 북암에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버린 절을 약휴대사의 노력으로 힘들게 복원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는 높직한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받침의 머리는 용의 머리화 되었는데 여의주를 물고 있지 있으며, 목이 매우 짧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 선암사 중수비의 귀부와 이수 모습

 

 

등은 선명하게 새긴 육각무늬로 덮혀있고, 중앙에 네모난 비좌를 마련하여 비를 꽂아두도록 하였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겼고, 윗면에는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 숙종 33년(1707)에 비를 세웠으며, 채팽윤이 글을 짓고, 이진휴가 글씨를 썼다. 조선 중기의 작품이긴 하나 조각이나 표현기법 등이 아름답다.

▲ 응진당

▲ 진영당

선암사 원통전(전남 유형문화재 169호)

▲ 원통전

▲ 장경각

 

 

선암사 원통전은 조선 현종 1년(1660)에 경준, 경잠, 문정대사가 처음 지었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다시 고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 모양의 재료를 놓아 그 위쪽의 재료들을 받치고 있다.

건물 앞쪽으로 기둥 2개를 내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조 기둥(활주)이 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로 사찰건축에서 보기 드문 T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다.

▲ 삼성각

▲ 무량수각

순천 선암사 측간(전남 문화재자료 214호)

▲ 선암사 측간 내외부 전경

 

 

선암사의 대변소 건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로,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래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하여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범종루와 이 건물이 있는 해천당 사이에는 지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상부층과 하부층으로 지혜롭게 분리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옛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다. 선암사의 측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남 지방에서 이와 같은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

선암사 삼층석탑 내 발견 유물(보물 955호)

 

 

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는 선암사삼층석탑(보물 제395호)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유물 3점이다. 동탑 1층의 하부에서 사리 구멍이 발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사리 구멍에서 나온 유물은 사리 장엄구로 청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가 각각 1점씩 있었으며, 사리 장치는 백자 항아리에서 나왔다. 이 백자 항아리 안에 비단으로 싼 금동 사리탑이 있고, 사리탑 안에 회백색 타원형의 사리 1개가 있는데, 사리는 팔각 원통 모양의 수정 그릇 안에 있다.

청자삼이소호는 높이 6.5㎝, 아가리 지름 4.1㎝, 밑지름 5.6㎝, 뚜껑 아가리 지름 6.4㎝, 뚜껑 높이 1.5㎝의 크기이다. 뚜껑의 윗면 중앙에 작은 돌대와 같은 꼭지가 있다. 항아리는 어깨가 벌어져 있고 몸체는 풍만하다. 어깨에는 한 줄의 음각선이 둘러져 있으며, 세곳에 각이 지고 구멍이 뚫린 꼭지가 나있다. 유색은 어두운 녹청색으로 미세한 빙렬이 전면에 나 있다.

분청사기분장유개호는 총 높이 12㎝, 아가리 지름 9.6㎝, 밑지름 7.2㎝, 뚜껑 높이 2.6㎝의 크기이다. 아가리 부분이 넓으며 어깨부터 벌어져서 몸체가 풍만하며, 뚜껑은 조그만 접시 모양으로 중앙에 꼭지가 있다. 유색은 백토로 분장되어 있는 표면에, 담청을 머금은 백색유가 두껍게 입혀져서 불투명하다.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사리탑은 높이 6.2㎝, 폭 1.9㎝의 크기이다. 사리가 모셔진 팔각 원통 모양의 이 사리탑은 백자 항아리 안에서 발견되었다. 3겹의 꽃잎이 위로 벌어진 연좌 위에 탑의 몸체와 지붕돌을 갖추었다. 사리탑은 1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의 사리장치 연구는 물론 당시의 금속공예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보물 1044호)

고려시대 승려인 의천의 초상화이다. 대각국사 의천(1032∼1083)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천태종을 열어 불교를 통합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 영정은 가로 110.2㎝, 세로 144㎝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것으로,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왼손은 긴 막대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단주(短珠)를 팔목에 끼고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사색에 잠긴 듯한 눈빛과 넓은 이마, 큰 코와 귀 그리고 꼭 다문 입에서 그의 학식과 수행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녹색의 가사를 걸쳤으며 금빛의 둥근 고리로 매듭을 대신하였다.

이 영정은 승려화가인 도일비구(道日比丘)에 의해 순조 5년(1805) 수정·보완된 것으로, 앞 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작이며, 혜근(惠勤)의 글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습기로 인한 얼룩이 있고 일부 굴곡진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문화재청 사진

선암사 대각암 부도(보물 1117호)

전형적인 8각 부도로,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옆면에 구름무늬를 새겨놓았고, 가운데받침돌은 각 면에 1구씩 안상을 얕게 새겼다.윗받침돌에는 8장의 연꽃잎이 둘러져 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으며, 앞뒷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평평하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진 면의 모서리는 굵직하고, 그 끝마다 큼직하게 솟은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보륜과 보주 등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조각수법과 지붕돌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 문화재청 사진

선암사 북부도(보물 1184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는 선암사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나 한적한 산중턱의 선조암이라는 암자에 세워져 있다. 3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을 올려 놓았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사자상과 구름무늬를 조각했고, 가운데받침돌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으며, 윗받침돌에는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고, 앞뒷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앞면 양 옆으로 인왕상을 배치했다.

투박해 보이는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큼직한 꽃장식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륜과 보주가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사자상, 구름모양, 연꽃, 인왕상 등을 새긴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 사진

선암사 동부도(보물 1185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선암사 무우전 뒷편의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이 부도가 보이는데, 사찰 안에 있는 3기의 고려시대 부도 중 하나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기단부는 8각의 바닥돌 위에 안상을 새긴 괴임대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조각한 아래받침돌을 올려 놓았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결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윗부분이 좁아진 사다리꼴 모양으로, 앞면에는 봉황이 새겨진 문의 양 옆을 지키는 인왕상을 새겨 두었고, 뒷면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짝을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달려있다. 꼭대기에는 갖가지 모양의 머리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8각 부도 양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각 부분의 만든 솜씨들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 문화재청 사진

선암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및 부속 유물 일괄(보물 1419호)

본존불만을 단독으로 등장시켜 간단한 구성을 보여주는 독존도(獨尊圖) 형식의 괘불화이다.

중앙에 홍련좌(紅蓮座)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큼직하게 그린 다음 상단 좌측(向右)에는 구슬장식이 화려한 금색 탑안에 사자좌를 한 '다보불(多寶佛)'추정의 불상이 앉아 있고, 밖에는 부처를 향해 합장한 보살상(대요설보살로 추정)이 배치되어있는 장면을 나타내었다.

이와 대칭하여 자리한 오른쪽(向左)에는 사자좌에 앉아 각자 손 모양을 달리하고 있는 '시방불(十方佛)'을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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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손상 없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괘불함은 전·후·좌·우 14곳에 손잡이용 고리가 달려 있으며, 궤의 각 모서리에는 어문(魚文)과 연화문(蓮花文), 나비무늬 등이 투각된 금속 장석을 장식하였다. 복장유물은 황동제 후령통 1조와 감지주서(紺紙朱書) 발원문 1매 및 백지묵서(白紙墨書) 9매, 백지주서 및 인본(白紙朱書 및 印本) 다라니 9매 등으로, 비교적 현상이 양호한 편이다.

선암사 괘불탱은 조성연대가 명확하여 화원인 '쾌윤(快允)'작품의 초기 경향과 함께 조선시대 18세기 중엽 경 불화 화단의 흐름을 살피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알맞은 신체 비례에 유려하면서도 정밀한 필치로 이목구비와 손·발을 묘사하고 꽃무늬들을 나타냄으로써 세련미가 돋보이는 등 조형성 또한 뛰어나다.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보물 1506호)

도선국사(827-898)는 신라말기에 활동한 선승으로, 남쪽지역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 ‘巖’자가 들어가는 세 절인 삼암사(三巖寺)의 하나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도선국사진영은 두 발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의좌상(椅坐像)으로, 오른손에는 주장자를 세워 들고 있다. 옷주름의 표현이 특이한데 녹색장삼은 색의 농·담(濃·淡)으로, 붉은 가사의 옷주름은 먹선과 흰선을 중첩하여 표현하고 있다.

화기에 따르면 1805년에 도일비구(道日比丘)가 선암사 대각국사(보물 제1044호) 진영과 함께 중수한 것으로, 이 두 진영은 유사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현존하는 고승진영 가운데 비교적 조성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함께 중수된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이 보물 제1044호로 지정된 바 있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47 x 112.5cm(전체), 131.5 x 105cm(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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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서부도 암감로왕도(보물 1553호)

선암사 감로왕도는 1736년 의겸(義謙)이 으뜸화원을 맡아 그린 작품으로 화기에 “서부도전하단도(西浮圖殿下壇圖)”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부도전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단에는 칠여래와 관음, 지장보살, 인로왕보살, 중단에는 한 쌍의 아귀와 제단, 하단에는 육도 제상을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감로왕도에서 주목되는 점은 상단에 그려진 칠여래가 중단과 하단에 비해 비중 있게 그려진 점인데, 이는 수륙재(水陸齋)를 통하여 중생들을 영가천도(靈駕遷度)하는 감로도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여겨진다.

황색 바탕위에 녹색과 적색을 주조로 한 차분한 색조와 안정된 필치,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육도제상의 장면은 화승 의겸의 역량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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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33조사도(보물 1554호)

이 작품은 『조당집(祖堂集)』에 근거하여 가섭존자부터 중국의 육조 혜능 스님까지 33명의 조사를 11폭으로 나누어 그린 선종 33조사도로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33조사도이다.

원래 총 11폭으로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7폭만이 남아 있는데, 1753년에 은기(隱奇)를 비롯한 5명의 승려화원이 그린 것으로 18세기 중반 불화 속에 수묵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던 의겸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에 묘사된 33조사의 도상은 중국 명대의 화보(畵譜)인 『삼재도회(三才圖會)』,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蹤)』을 모본으로 하고 있어 조선후기 화보의 전래와 불화 도상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중요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33선종조사도라는 희귀성과 함께 도상의 구성방식과 정취한 필치 등에서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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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강희39년 명 동종(보물 1558호)

높이가 120㎝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 작품에 속하는 이 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700년(강희 39) 조계산 선암사 대종으로 800근의 중량을 들여 개주(改鑄)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이 때 새로이 주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김상립(金尙立)의 아들 김수원(金守元), 도편수(都片手) 김성원(金成元), 부편수(副片手) 김효건(金孝建), 김성원의 아우 김섬태(金暹泰) 등 18세기에 활동했던 김상립과 그의 아들 등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김상립을 중심으로 한 사장계(私匠系)의 활동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이 종은 종의 형태가 조선후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활기찬 쌍룡뉴와 유곽대, 보살상과 왕실 안녕을 기원하는 문구가 담겨 있는 전패 등 각 부의 문양이 세련되는 등 전체적으로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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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순치14년 명 동종(보물 1561호)

본래 보성군 대원사 부도암 중종(中鍾)으로 주조된 이 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주종장인 김용암(金龍岩)이 1657년에 주성한 종이다.

전반적으로 종신(鍾身)의 비례가 적당하고 안정감이 있어 격조가 있다.

종 고리는 두 마리 용이 각기 한 발을 들어 보주를 받쳐 든 생동감 넘치는 쌍용뉴(雙龍鈕)를 채용하였으며, 범자가 장식된 천판의 복련문대, 상·하대의 범자문대(梵字紋帶)와 연화문대(蓮花紋帶), 정연한 유곽과 연화당초문대, 제석·범천상과 왕실안녕 발원의 위패 등에 이르기까지의 각 세부 표현에 있어서도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담양 용흥사종과 함께 김용암 동종의 대표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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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안내도

순천 선암사 위치도

 소재지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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