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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출신 임란1등공신 백기당 조웅(趙熊)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2. 2. 18. 11:42

 

 

충주출신 임란1등공신 백기당 조웅(趙熊)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서 충주 가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백기당 이고 본관은 한양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빼어난 재질이있었으며 기개가 호탕하고 영특하였다. 그리고 성장 해서는 몸이 장대하고체력이 절륜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조강에게 사사하여 유학을 수업하다가 뜻한바 있어 무예를 익혔으니 조강도 그를 보고는 곧 간성의 재목임을 알아차리고 무예를 권했다고 한다.

 

그는 말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으며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말 위에 서서 달리면서 활을 잘 쏘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날으는 장군의 용맹스러움을 여기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고 칭송 하였다고 한다.

 

 

대평촌의 정려각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 무가 출신으로서 그도 뜻한 바 있어 일찍부터 무예를 익혔다. 그의 뛰어난 무예는 드디어 인정을 받는 바가 되어 1591년(선조 24)에 조헌에 의해서 장차 장수가 될 재목이라고 국왕에게 추천되어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 할 때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달천전투에서 대패하자 국왕은 의주로 떠나고 나니 나라 안은 무인지경처럼 일본군에게 짓밟히는 바가 되었다.

 앙성에서 조천 영축방향으로 가다가 조대고개를 넘어서 바로왼쪽으로 ..이정표가

 묘지전경.

 이때에 조웅은 충주의 고향집에 있다가 조정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국난을 당해서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끝에 내 고향을 지킴으로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모집, 충주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여 서울로 향해 북상하는 왜적의 후속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조웅이 처음에는 스승이었던 조강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합진했다가 얼마 후에 요지에 주둔하여 적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의병진을 나누어 충주에 와서 주둔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기치를 모두 흰색으로하여 군호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고 하였다. 벌떼 같이 일어났던 팔도 의병중 호서의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곽재우)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였으며 왜적들도 홍군과 백군을 피하라고 말하였다고 하니 그의 무예와 지략, 중용과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호를 백기당이라고 한것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가 호를 백기당이라고 한것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조옹이 충주에서 적을 맞아 잘 싸우니 충청도의 백성들은 이에 귀의하고 의존하게 되었다. 한때는 왜적의 대부대가 충주로 몰려들었는데 그는 백기를 날리며 진군하니 군사들도 사기가 충천용약하여 앞을 다투어 나아가 왜적과 강북(지금의 충주시 소태면)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총과 화살이 우뢰와 같이 퍼부어 졌으며 불길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 졌으나 그는 선두에 서서 종일토록 독전 하므로써 사살한 적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충청도체찰사가 이 사실을 행제소의 국왕께 알리니 행조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그 벼슬을 당상관에 올리고 충주목사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그러나 이무렵에 적의 대부대는 충주와 원주 방면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그 진영이 서울에 가까이 있었으며 충주의 적은 죽산·양지·용인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 서울로 왕래하고 있었으니 앙성 일대의 조웅이 지키던 곳은 그 길목이 된다.

 그런데 원주의 적이 서울로 통하는 길목인 원주의 구미포에서 강원도 조방장 원호에 의해 섬멸 당하니 왜군의 통로는 자연 충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충주는 더욱 위험한 상태에 있게되었다. 조웅은 이 무렵에 오직 무예로서 병졸들을 훈련하여 국치를 설욕하려는 마음 뿐이었으나 강북의 싸움에서 군사들은 모두 지쳐 있었고 자신도 부상당한 몸을 가누며 진을 치고 있던 어느날 안개가 짙게 깔리어 어두운 때를 이용하여 적은 겹겹이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총탄이 비오듯 하고 화살과 돌이 엇갈려 상황이 위급하게 되니 군졸들은 대오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창을 꼰아잡고 단기로 앞장서서 돌격하라고 호령하며 나아가서 수십명의 왜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어서 끝내 적의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왜적에게 손과 발이 잘리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으나 왜적 꾸짖기를 그치지 않자 끝내는 사지를 찢기어 죽움을 당하게 되었다.
1605년(선조 38) 4월 조정에서는 그의 충성과 절의를 추도하여 병조참의에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였으며 1618년(광해군 11)에는 다시 병조참판에 추증하였다. 조웅에게는 부인 나주최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희성과 희영이 있었다.

 묘지 뒤에서 바라본 전경

  장남 희성의 아들 홍운은 그의 조부의 공적을 길이 전할 뜻을 가지고 조정에 정문의 은전을 베풀어 달라고 진정하여 1690년(숙종 16) 그의 정려문을 묘소 앞에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그 정문이 없어져 찾을길이 없는데 종손의 말에 의하면 한말 왜인들의 손에 의해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탄금대 공원에 세워진 조웅장군 기적비

 


다행하게도 지금 정문의 현판이 종가에 보관되고 있어
1980년 11월에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에 다시 정문을 복원하여
그의 지난날의 충성된 업적을 길이 전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에 의해 탄금대에는 백기장군조웅기적비가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