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관광♣/문화소식·문화유적

[문화재 여행] 국보와 보물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5월의 충주 '청룡사지'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2. 5. 26. 08:20

[문화재 여행] 국보와 보물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5월의 충주 '청룡사지'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사자석등, 융탑비를 소개 합니다.

  

 

충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이처럼 귀한 국보와 보물이 있으니 가족나들이로 적극 권장하고 싶다.

주차장 시설은 물론이고 또한 문화해설사로 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남한강을 따라 찾아가는 길목은 5월의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즐거움을 준다.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청룡사지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국보 제197호)와 정혜원융탑전 사자석등(보물 제656호)

 그리고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보물 제658호) 가 자리를  하고 있다.

 

 

 

 

 

 

 그간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의 위축으로 불사(佛事)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부도의 건립도 왕실과 관련된 일부 고승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청룡사지에는 고려 말기 주요하게 활약하다가 1392년 9월 입적한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1320~1392]의 부도를 비롯하여 탑비·석등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부도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에게 세워졌던 사후(死後) 기념적인 조형물이었다. 조선 초기까지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다.

 

 

 

 

보각국사는 고려 말기 주요하게 활약한 고승으로 공민왕우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던 승려였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로부터도 상당한 공경을 받았다.

보각국사 혼수는 1392년 7월 태조 이성계의 즉위에 축하를 표하고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아 충주 청룡사로 하산하였다. 1392년 9월 18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세수 73세, 법랍 60세)하였는데, 이에 문도들이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였다.

 

 

 

 

태조 이성계보각국사의 부음을 듣고 내신(內臣)을 보내서 조문하고 부도 건립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태조는 또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호(塔號)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내리고, 1392년 12월 청룡사 북봉(北峰)에 부도를 세워 유골을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보각국사는 여러 왕들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고, 국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후원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주차장에서 50m만 올라가면 접할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하면 청계산 등산로를 따라 등산도 권장하고 싶다  

 

 

주차장에서 담은 사진이다. 문화해설사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오르면서 첫번째 접한 위조비  

 

 

절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와가 보인다. 

 

 

 석종형 부도를 볼 수 있다.

 

 

맨위에 위치한 국보와 보물이 한자리에 있다 

 

 

정혜원융탑전 사자석등(보물 제656호)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진 장명등(長明燈 : 능묘 앞에 설치한 석등)으로서, 고려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방형등(方形燈)의 일종이다. 보물 제6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룡사는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걸쳐 이룩되었다고 추정되는 사찰로서 오량리 뒷산인 청룡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청룡사의 옛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절터 북쪽 골짜기에 석등 지대석과 함께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塔碑)만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석등은 본래 보각국사비와 정혜원융탑앞에 배례석과 함께 부도를 장엄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나 최근 대웅전 앞으로 이건하여 원래의 위치에는 현재 지대석만 남아 있다.

 

높이 203㎝인 이 석등은 현재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재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부재가 네모난 데 비하여 하대석(下臺石)이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일명 사자석등이라고도 한다.

 

1매의 돌로 이루어진 네모난 지대석(地臺石)은 윗면에 사자를 안치하기 위하여 사자모양의 윤곽이 패어 있으며, 거북모양의 사자 1마리가 하대석 대신 놓여 있다. 툭 불거진 눈과 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 사자상은 울퉁불퉁한 근육과 함께 내딛고 있는 앞다리·뒷다리가 매우 힘있게 표현되었으며, 옆으로 비낀 꼬리 또한 유려하게 조각되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하여 구부리고 있는 사자의 등에는 초화문(草花文)이 정연하게 조식되어 있는 말안장모양의 네모난 장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중대석인 간주석(竿柱石)을 떠받들 수 있도록 1단의 네모꼴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역시 1매의 돌로 낮게 조성된 간주석의 네 면에는 亞자 모양의 안상(眼象)이 두 겹의 선으로 조식되어 있으며, 각 안상 내부에는 삼각형을 이루는 3개의 원형무늬와 함께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불꽃무늬〔火焰文〕가 선각되어 있다.

 

지대석과 같이 네모꼴을 한 상대석은 아랫부분에 1단의 각형 받침이 돌출되게 조각되었고 8엽의 복판앙련대(複瓣仰蓮臺)가 마련되어 있는데,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으로서 이는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의 회암사지석등(檜巖寺址石燈) 앙련대와도 비교가 되는 것이다.

 

다른 부재와 마찬가지로 1매의 돌로써 만들어진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네 모서리에 둥근기둥모양〔圓柱形〕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불을 넣는 화창(火窓)은 앞뒤로 2개만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석등에 보이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화창의 형태가 다른 석등에서와는 다르게 방형으로서 화창의 전후 좌우로 관통시켰으며, 네 기중에는 원형의 기둥주를 묘사했고, 화창의 밑부분에 창벽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화사석 위의 옥개석(屋蓋石) 역시 한 매의 네모난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밑부분에는 1단의 각형 받침과 함께 네 개의 서까래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지붕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로 궁형(弓形)을 이루고 있다.

 

추녀 끝이 조금 치켜올라간 처마의 곡선은 약간 반전하고 있으며, 합각의 용마루는 둔하고 두꺼운 고려시대 승탑(僧塔)의 옥개석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륜부는 보주(寶珠)를 설치하였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결실되었다.  

 

정혜원 융탑비 (보물 658호)

 

 

1394년(태조 3) 건립. 비신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보물 제658호. 화강암 석재의 것으로 대석(臺石)은 네모난 모양이며, 개석은 없고, 비 전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어 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어가고 있다.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우고,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비문에 보각국사의 이름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속성은 조씨이고 풍양현 사람이며, 보각국사와 탑명인 정혜원융은 시호임이 나타나 있다.

 

이밖에 1320년(충숙왕 7)에 출생하여 계송(繼松)에게 법을 받고, 1332년(충혜왕 2)에 승과에 급제한 뒤, 1370년(공민왕 19)에는 공부선장(工夫選長)에 뽑혔으나 왕의 요직임명을 거절하였고, 그 뒤 왕의 청으로 내불당(內佛堂)에서 왕에게 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다.

 

1383년(우왕 9)에 국사가 되고 73세에 입적한 일과, 국사의 덕과 지혜는 나라에서 추앙할 만하여 왕명으로 비를 세운다는 명문이 적혀 있고, 비음에는 문도와 소문도의 명단을 새겨 넣었다.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에 걸쳐지는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 이 비 이후에 조선조를 통하여 이에 필적할 글씨가 없음을 보여주는 바는 특기할만한 일이다.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국보 제197호)

 

 

정혜원융탑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부도는 크게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평면 팔각의 지대석과 하대석으로 결구되었는데, 1976년 복원 당시 지대석 하부에서 석실(石室)이 발견되었다. 즉 보각국사 유체를 화장한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지대석 하부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상면에 단판 16엽의 세련된 연화문을 장식하여 공양의 의미를 더하였다.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형의 별도 화형 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인다.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각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운룡문(雲龍紋)과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사자상과 용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으며 수호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상하로 대칭되도록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상부에 높은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탑신석은 상대석 상면에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삽입·고정되도록 했으며,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둥은 중국에서 나라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성행한 양식이었다.

탑신석 각 면에는 1구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부도에 대한 강한 수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옥개석은 하부에 넓은 받침과 추녀와 사래가 번안되었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마루부는 높게 돌출시켰는데 아래쪽에 용두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다. 이와 같이 마루부에 용두가 새겨진 경우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는 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원래는 여러 부재들이 결구되어 상당히 고준하고 장엄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추출 : 네이버 지식사전 

 

 

 

 

 

 

  

 

위의 블로그 글과 사진 / 충주시 블로그 기자단 '이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