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한국보물(국보)

해남 대흥사 금동 관음보살좌상

충주시홍보대사/김광영 2010. 12. 20. 12:36

 

보물 1547호(해남 대흥사 금동 관음보살좌상)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부도밭을 지나서 대흥사 경내로 들어서면...

▲ 대흥사 해탈문과 문수/보현 동자상

▲ 대흥사 경내 원경

▲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는 무량수각 현판과 건물

▲ 범종각

▲ 응진당과 산신각

대흥사 응진전 전 삼층석탑(보물 320호)

대흥사 응진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 위에 복발, 앙화, 보륜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흥사 천불전/천불상(전남 유형문화재 48호/52호)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을 하였고 정교한 국화무늬·연화무늬의 꽃살 분합문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은 2짝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을 하였고 정교한 국화무늬·연화무늬의 꽃살 분합문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은 2짝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 대흥사 성보박물관 전경

탑산사 동종(보물 88호)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종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매다는 곳인 용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부분에는 연꽃으로 띠를 둘렀고, 그 아래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사각형의 유곽 안에는 가운데가 돌출된 연꽃을 9개 두었는데, 신라 때의 유두보다 훨씬 납작해진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 있는 글과 양식으로 보아 종의 제작시기는 고려 명종 3년(1173)이나 고려 고종 20년(1223)으로 추정된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 표충사에서 바라 본 성보박물관과 서산대사 동상

표충사(전남 기념물 19호)

▲ 표충사와 내부 전경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를 모시는 사당이다 현재 그의 제자인 유정과 처영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 12년(1788)에 세웠으며 앞면 3칸 규모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서산대사는 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울에 올라와 절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명종 4년(1549)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만나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 표충사 좌우측에 있는 조사당과 비각/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 ▼

대흥사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94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초의선사가 조선 헌종 7년(1841)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집이다. 내부는 불단이 있는 중앙부 위에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을 높게 달고, 연꽃무늬와 구름·학 등을 그렸다.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하였다고 하는데, 색채와 문양면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자연적인 곡선을 보이는 내부의 대들보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흥사 북미륵암으로 오르면...

▲ 동삼층석탑에서 내려다 본 북미륵암 전경

▲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보수중인 임시 건물과 계단 우측 바위에 새겨진 각자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308호)

바위면에 고부조되어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본존불의 육계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를 나타내었다.

손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로 그 주름은 거의 등간격으로 선각화 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대좌는 11엽의 앙련과 12엽의 복련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와 몸 광배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으로 아무런 꾸밈도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둔중한 체구로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

▲ 답사 당시 해체된 북미륵암 삼층석탑 주변 전경

두륜산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세워진은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일반형에 속한다. 기단은 지대석 위에 귀기둥과 탱주를 새긴 하대석과 중석을 갖추고 있고 갑석은 4매로 되어 있다.

상층기단 중석과 갑석은 1매석으로 되어 있는데 갑석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고 각 탑신에는 네 개의 귀기둥을 본떠 새겼다.

옥개석들은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받침은 1, 2층의 옥개석은 4단, 3층은 3단이며, 전체의 개석 윗면은 얇은 탓으로 경사도가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현재 노반이 남아 있고 노반형과 앙화형의 석재가 놓여 있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 석탑은 비교적 정제된 석탑이며 양식적으로는 약화된 점도 있으나 신라 석탑의 형식과 양식을 일부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성년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본다.

◀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의 옛 사진(문화재청)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245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암반 위에 단층 기단부를 안치하고 그 위로 탑신부를 구성하여 고려시대(10∼11세기)에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어 가치가 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은 신라 전형양식의 3층 석탑이다. 자연 암반을 뒷면에서 보면 평평하지만 전면에서 보면 높이 92cm의 높은 층단을 이루고 있어 자연 암반 자체가 지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암반과 하층기단 사이에 벌어지는 빈틈으로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단부 밑에 깊이 15cm가량 되는 두 줄의 홈을 파놓았다. 또 기단부 옆에도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주 엷게 홈을 파놓은 지혜를 발휘했다.

기단부 구성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좌우로는 벽판석이고 전후면은 삽입식인데 각 면의 양 귀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중앙에 탱주 1주씩을 표출하였다. 그런데 중앙의 탱주가 상하의 폭이 같은 기둥이 아니고 위쪽은 좁고 아래쪽이 넓은 이를테면 팔자(八字)형으로 되었다. 위쪽은 폭 24cm, 아래쪽은 가장 넓은 면이 74cm나 된다. 이러한 탱주 기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이 석탑은 비록 단층 기단이긴 하나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과 동시대인 10∼11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같은 북미륵암 경내에 있는 보물 제301호인 삼층석탑 조성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원래는 3층 옥개석이 파손되어(현재 이 탑 옆에 있음) 있었던 것인데 4∼5년 전 새로 3층 옥개석과 상륜부를 제작하여 복원하였다. 비록 석탑의 일부 부재를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균형미를 잃지 않고 있으며 또한 매우 정제된 우수한 탑이다.

▲ 동삼층석탑 뒷편에 있는 산신각 전경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73호)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을 띤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라는 산벚나무와 그보다 낮은 곳에 자라는 올벚나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란 설도 있으나, 제주도와 전라남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으로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는 대흥사 뒷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2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이는 알 수 없으며 큰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0.8m이고, 작은 나무의 높이는 7m, 둘레는 0.3m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에서는 유일한 왕벚나무 자생지로 현재는 철책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가 크므로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 금동 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이 상은 윤왕좌(輪王坐)의 보살상으로 금동불로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보살상의 세부 표현과 양식은 전반적으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다.

길죽하면서도 부은 듯한 얼굴모습, 유두를 두드러지게 표현한 점, 몸 전면에 영락이 표현되지 않은 점, 몸을 감고 있는 천의자락의 선이 다소 경직되게 표현된 점 등은 조선전기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이 보살상은 조선 전반기의 금동상으로서 규모가 큰 편이고 보관 등에 다소 파손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이 크기가 큰 윤왕좌의 보살상은 조선 전기 보살상 중에서는 그 예가 드물며, 신체의 균형이 좋으며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 주름 등 조각기법이 매우 우수한 금동보살상이다.

◀ 문화재청 사진

해남 대흥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552호)

색민(色旻)이 으뜸화원을 맡아 조성한 괘불로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여의를 든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연꽃을 든 보현보살을,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두광 좌우로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배치하여 오존도(五尊圖)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도상적 특징은 내소사 괘불을 비롯하여 안정사 괘불, 청곡사 괘불, 운흥사 괘불, 다보사 괘불 등 18세기 호남지역에서 성행한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근거한 도상을 간략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괘불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소 살찐 듯한 인물표현,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문양 등은 색민이 스승인 의겸(義謙)의 화풍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선행 도상과 화풍을 잘 계승하고 있는 귀중한 작품이자 색민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 문화재청 사진

대웅보전 -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

 

무량수각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

 

해남 대흥사 안내도

해남 대흥사 위치도

 소재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화살표 위의 지도 중앙에 대흥사가 있습니다.